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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코끼리보다 한국 코끼리가 영리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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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박승희
워싱턴 총국장

얼마 전 미국인 친구에게 들은 조크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넣는 새로운 방법. 냉장고 문을 연 뒤 ‘이 안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없다’고 하면 냉큼 들어간다.” 미국 정치에서 코끼리는 공화당을 상징한다. 그러니 이 조크는 공화당의 반(反)오바마 정서를 풍자한다.

 대선을 60여 일 남겨놓고 미국 공화당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조바심이 난다. 밋 롬니는 온건 보수론자다. 한데 막상 후보가 되고 나서는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만 향하고 있다. 대선을 1%의 가진 자 대 99%의 못 가진 자 구도로 몰아가는 오바마 대통령을 상대하다 보니 이데올로기라는 ‘진영 싸움’에 갇혀 중간지대에서 자꾸 멀어진다는 거다. 오바마가 동성 간 결혼을 허용하자 공화당은 강간으로 임신했어도 낙태를 금지한다는 정강을 마련했다. 토드 아킨 미주리주 하원의원은 한술 더 떠 “여성의 몸은 진짜 강간을 당할 땐 임신을 막기 위한 (생리적) 방어 기제가 작동해 낙태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기상천외한 실언으로 여성 표를 단숨에 날렸다.

 미국의 보수가 진보할 길은 없는가. 공화당원들이 우상으로 삼는 대통령이 있다. 역대 대통령 중 인기 1위인 로널드 레이건이다. 보수의 상징과도 같다. 하지만 레이건에 관한 책을 5권이나 쓴 루 캐넌은 레이건이 사랑받은 비결 중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 하나가 보수의 이데올로기에만 갇혀 있지 않은 점이라고 말한다. 캐넌은 “레이건은 타협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뭐라고 말했는가’보다 ‘무엇을 했는가’를 봐야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입으론 작은 정부를 말했지만 8년 재임 기간 동안 연방 공무원 수를 30만 명 이상 늘렸고, 감세를 말했지만 8년 동안 12차례 세금을 올렸다. 위기 때마다 민주당 사람들을 과감하게 요직에 등용한 것도 레이건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손자인 커티스 루스벨트는 공화당이 오바마의 프레임에 갇혀 “반대, 반대”만을 외치다 보니 롬니 지지율이 50%를 넘지 못한다고 진단했다. 워싱턴포스트의 조사에 따르면 공화당원의 81%가 오바마를 싫어하지만, 민주당원의 83%도 롬니를 싫어한다. 철저한 정치 양극화다. 경제를 걱정하는 중간층들은 마음 둘 곳이 없다. 롬니와 공화당이 오바마를 보지 말고 그 너머의 중간층을 봐야 하는 이유다.

 따지고 보면 동서고금이 마찬가지다. 1997년 김대중 후보는 김종필과 덧셈정치를 했고, 2002년 노무현 후보는 정몽준이라는 중간지대를 끌어안았다. 2007년 이명박 후보는 경제라는 블루 오션을 선점해 승리했다. 내 표만으론 이기기가 어려워서다.

 태평양 건너에서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광폭 행보를 한다는 얘기가 들린다. 그러고 보면 현재까진 한국의 ‘코끼리’가 미국의 ‘코끼리’보다 영리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