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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배심원의 ‘미국식 정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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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김창우
경제부문 기자

삼성이 애플에 패하자 삼성 직원들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이후 재판에서 우리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회사의 차분한 공식 입장에도 분노가 좀처럼 식지 않는다. 한 엔지니어는 “수십 년을 고생해 남부럽지 않은 기술력과 특허 포트폴리오를 쌓아놨는데, 난데없이 디자인특허로 1조원을 훌쩍 넘게 배상하라니 황당하다”고 말했다.

 삼성의 억울한 심정은 충분히 이해된다. 삼성은 해외 업체에 해마다 수천억원의 특허 사용료를 지불하는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수조원을 들여 특허 방벽을 쌓았다. 이를 바탕으로 IBM을 비롯한 특허 강자들과 크로스라이선스(특허 상호 사용) 협약을 맺었다. 하지만 애플은 이런 ‘시장의 법칙’을 깼다. 통신 분야 특허가 부족한 애플은 삼성을 비롯한 부품업체들로부터 사 모은 부품을 조립해 빼어난 디자인으로 제품을 완성하고, 여기에 ‘혁신적’이라는 운영체제(OS)와 사용환경(UI)를 얹어 이익을 얻었다. 애플의 세계 휴대전화 시장 점유율은 6%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익은 전체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여기에 디자인과 UI로 특허 사용료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삼성에는 스마트폰 한 대당 30달러를 요구하고, 삼성이 통신특허를 제공할 경우 6달러를 깎아주겠다고 제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24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나온 평결은 ‘미국식 정의’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감성적으로 ‘좋은 편’과 ‘나쁜 편’을 가려내는 쪽으로 흐르기 쉬운 배심원 재판의 속성을 감안해도 애플의 디자인특허 침해로 삼성에 10억 달러의 배상을 명한 것은 유럽과 한국 법원의 판결과 비교해 볼 때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외신들도 애플의 일방적인 승리에 놀라움을 표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앞마당(home-town) 배심원들이 애플에 스마트폰 시장을 좌우할 권한을 줬다”고 논평했다.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이 디자인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점이 아쉽긴 하나 반도체에서 시작해 디스플레이·TV·휴대전화에 이르기까지 세계 정상에 올랐는데, 이대로 주저앉을 이유는 없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제임스 얼워스 교수는 “삼성이 애플을 베꼈다 해도 그게 어쨌단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위대한 혁신은 기존의 혁신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며 “기업 간 카피는 혁신에 방해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미국 배심원들의 ‘애국적인 평결’은 장기적으로 삼성에 쓴 약이 될 수 있다. 이미 외신들은 “삼성은 2007년의 아이폰 쇼크를 딛고 일어서 최근 들어 갤럭시S3나 갤럭시 노트 같은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