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야구] 스타 스토리(28) - 고쿠보 히로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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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쿠보가 살지 않으면 우리 팀의 우승도 힘들다. 언젠가 제 몫을 해줄 것이다."

99년말 다이에는 여유가 없었다. 이해 다이에는 73년 난카이 시절이래 26년만의 리그우승을 위해. 강호 세이부와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2할을 겨우 넘기고 있던 고쿠보를 끝까지 4번타자로 중용하는 것은 상당히 무모해 보였다. 그 당시 고쿠보는 탈세의 충격과 부상 후유증으로 전혀 타격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정치의 눈은 정확했다. 왕정치는 고쿠보의 잠재력을 믿었고, 결국 이런 그의 우직한 신뢰는 그해 다이에를 우승으로 이끔과 동시에 '4번타자 고쿠보'가 재기할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도대체 고쿠보가 어떤 타자이길로 일본야구의 전설로까지 추앙받는 왕정치의 마음을 이토록 사로잡았을까?

71년생인 고쿠보는 와카야마현 출신이다. 고쿠보는 내야수로 활약하던 아오야마 학원대학시절부터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유일한 학생대표로 선발될 정도로 이미 그 재능을 인정받는 기대주였다.

이후 대학을 졸업한 94년, 드래프트 2위로 다이에에 입단한 고쿠보는 탄탄대로를 밟아 올라갔다. 개막전부터 6번 라이트로 교체출장하는 등, 첫해부터 1군에서 활약하는 기회를 얻으며 경험을 쌓아갔다.

이후 95년, 외야수에서 2루수로 전향한 고쿠보는 이해 130경기 출장에 28홈런을 몰아치며 데뷔 2년만에 일약 홈런왕에 올라 퍼시픽을 대표하는 타자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본래의 포지션인 3루로 정착한 고쿠보는 이해에도 24홈런을 기록하며 상승세를 이어갔다.

그리고 97년 고쿠보는 다시한번 비상했다. 이해 고쿠보가 135전경기에 출장해서 올린 타율 .302, 159안타, 36홈런, 114타점은 전부 개인 최고기록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고쿠보가 다이에 부동의 4번이자 이치로와 쌍벽을 이루는 퍼시픽리그의 최고 타자란 걸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후 고쿠보는 나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97년말 불거진 탈세혐의에 연루된 것이었다. 10여명의 야구선수들이 경영 컨설턴트와 짜고 영수증을 허위처리해 수천만엔의 세금을 포탈한 것인데 이 사건에 고쿠보가 연관된 것이었다.

이 일로 인해 고쿠보가 치룬 물질적, 정신적 대가는 엄청났다. 그는 우선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벌금 7백만엔이란 법의 심판을 받았고, 다이에 구단으로부터는 무조건 연봉 30% 삭감이란 징계를 받았다. 여기다 일본야구기구로부터는 98년 6월까지의 전경기 출장정지란 중징계 처분까지 받았다.

그러나 고쿠보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큰 타격은 그동안 쌓아왔던 스타로서의 이미지 실추와 그를 아껴준 팬들의 실망이었을 것이다.

이후 몇년간 고쿠보의 야구인생은 꼬여만 갔다. 특히 98년은 그에게 있어 악몽 그 자체였다. 고쿠보는 징계가 풀려 복귀하자마자 부상을 당한 탓에 이해 고작 17경기밖에 출장하지 못하며 과거의 명성에 먹칠을 했다.

이어 99년에도 고쿠보는 좀처럼 제 페이스를 찾지 못했다. 부상을 입었던 다리의 상태가 완벽하지 않았음에도 130경기에 출장하며 그해 다이에의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이란 감격을 누리긴 했지만 그해 그가 거둔 성적은 타율 .233에 24홈런, 77타점에 불과했다.

우승팀의 4번타자로선 너무 저조한 타율이었고, 빈약한 타점이었기에 결코 만족스럽다고 볼수 없는 기록이었다.

그러나 새천년 시즌부터 고쿠보는 서서히 과거의 위력을 되찾아가며 지독한 부진에도 2년여를 꾹참고 기용해준 왕정치 감독의 기대에 보답해나가기 시작했다.

비록 개막전 4번을 맡지 못하고 5번으로 시즌스타트를 끊어야 했지만 이후 5월부터 4번으로 복귀한 후, 고쿠보는 점차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해 고쿠보는 연속경기안타 팀기록 달성, 10경기 연속타점을 올린 걸 비롯, 타율 .288, 31홈런, 105타점의 활약으로 팀의 4번을 책임질 수 있는건 역시 고쿠보밖에 없다는 왕정치 감독의 말을 입증했다.

10월 7일 오릭스전에서 결승솔로홈런을 작열하며 다이에의 리그 2연패를 결정지은 고쿠보는 역사적인 ON시리즈에서도 팀의 4번으로서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받았지만 3차전에서 불의의 옆구리 부상을 입는 바람에 시리즈에서 이탈, 팀의 역전패를 지켜봐야만 했다.

지난해부터 부활의 씨앗을 뿌린 고쿠보는 올시즌 현재 만개한 타격으로 제 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10일까지 고쿠보는 득점 1위(36점), 홈런 2위(15개), 타점 2위(41점)를 기록하며 다이에의 선두질주를 이끌고 있다. 현재 고쿠보의 페이스라면 올시즌 그가 목표로 삼았던 전경기출장 및 40홈런 달성도 그리 무리는 아닐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젊은 나이에 성공과 좌절을 경험했다. 지금 그가 휘두르고 있는 방망이는 지난날의 과오를 극복한 것이기에 한층 더 완숙함을 느끼게 한다. 고쿠보 히로키. 올시즌 다이에의 리그 3연패 대야망은 그의 이런 활약이 있기에 보다 신빙성있게 와 닿는다.

-고쿠보 히로키 (小久保 裕紀)-
생년월일: 1971년 10월 8일
신장,체중: 182cm, 87kg
소속팀: 다이에(94-), 백넘버: 9번
투타: 우투우타
통산성적: 741경기, 2656타수, 709안타, 151홈런, 485타점, 36도루, 통산타율 .267(2000년까지)
수상경력: 95년 홈런왕, 97년 타점왕
95,97년 베스트나인(2루수 부문), 95년 골든글러브
2000년 9월 24일 긴데쓰전에서 150홈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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