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의 향기

가뭄에 고사한 나무를 보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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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기택
시인

푸른 가로수들 사이에 잎이 누렇게 마른 고사목(枯死木)들이 보인다. 장마까지 견디지 못하고 가뭄에 시달리다 죽은 것들이다. 여러 번 가뭄이 왔지만 가로수들이 말라 죽는 가뭄은 처음 보았다. 그 후에 비가 꽤 왔지만 그 나무들은 다시 살아나지 못했다. 이어서 온 폭염에 더 바싹 말라버린 것 같다. 슬픔을 무진장 감춘 풍성하고 청명한 가을이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오고 있다.

 옛날에 지리산에 올랐을 때 보았던 고사목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지리산 고사목은 대개 키가 작고 가지가 거칠게 잘려 있거나 심하게 뒤틀려 있다. 죽은 나무인데도 뒤틀림과 부러짐의 역동적인 기운 때문에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무 속에 스며 있는 강한 겨울바람이 생생하게 보인다. 그 추위와 바람은 여전히 나무 속에 살아 있으면서 가지를 뒤틀거나 부러뜨리고 있는 것 같다. 나무는 죽어도 나무가 살아온 과정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 같다. 한번 올린 팔을 절대로 내리지 않는 고행을 해서 팔이 하늘을 향한 채 굳어버린 인도의 수행자를 보는 것 같다.

 고사목은 뼈를 닮았다. 잎과 껍질과 수액이 다 사라지고 단단하고 흰 줄기와 가지만 남았으니 식물의 뼈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나무보다는 사람이나 동물의 뼈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바람 부는 방향으로 가지들이 휘어져 있는 어떤 고사목은 햇빛에 흰빛이 유난히 선명한 데다 그 휘어진 가지의 모양이 척추를 둥글게 둘러싼 갈비뼈 같아서 마치 사람의 뼈가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과 나무는 살아 있을 때는 닮은 점이 거의 없는데 사후에 서로 닮는다는 게 신기하다.

 뼈는 몸이 죽은 후에 머리카락과 함께 가장 늦게까지 썩지 않고 남는 부분이다. 뼈는 살이나 피나 신경이나 체액처럼 몸을 괴롭히는 고통이나 욕망을 만들지 않는다. 뼈에는 살에서 나는 비린내나 악취도 없다. 죽으면 우리 몸에는 물렁물렁하거나 끈적끈적하거나 흐르는 것들은 다 없어지고 단단한 것들만 남는다. 그런 점에서 살과 피는 동물적인 데 반해 뼈는 식물적인 것 같다.

 나무는 제 몸의 가장 단단한 부분에 혹독한 추위와 세찬 바람이 지나간 고통의 흔적을 새겨놓는다. 죽은 가지와 줄기의 날렵하고 역동적인 곡선에다 생명을 위협하던 추위와 바람을 살려놓는다. 아름답게 뒤틀린 고사목의 그 곡선을 고통의 항체라고 부르고 싶다. 나무들이 생존하기 어려운 가혹한 조건 속에서 삶을 지켜낸 단단하고 아름다운 힘이 보이기 때문이다.

 항체는 자기도 모르게 생기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 심한 열병이 지나갔던 자리, 그 병과 싸워 이겨낸 자리에서 생긴다. 우리 몸에는 알게 모르게 큰 고통이 지나간 흔적이 있을 것이다. 내 몸이나 말이나 행동이나 버릇 어딘가가 뒤틀려 있다면 그 흉한 곳은 바로 항체가 생긴 자리일지 모른다. 남에게 보이기 싫은 흉한 상처가 지금의 나를 강하게 단련시켜 생명을 보존하게 해준 보물일 수도 있다.

 출근시간 지하철에는 늘 신문을 수거하는 노인들이 보인다. 승객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그 노인들에게 관심을 갖는 이들은 별로 없다. 그러나 나는 소설 몇 권은 나올 것 같은 격동의 드라마가 저 몸에, 저 몸이 지나온 시간에, 산 채로 저장돼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보곤 한다.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오늘까지 삶을 이어오게 한 고통의 항체가 어떤 모양일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볼품없는 외모나 빈약한 경제력이나 어눌한 말이나 둔한 행동 때문에 무시당하는 사람들에게도 상상하기 어려운 큰 고통의 항체가 있을지 모른다.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두리번거리거나 졸거나 수다를 떨거나 멍청하게 앉아 있는 평범하고 어수룩해 보이는 사람들도 겉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얼굴을 하고 있지만 안으로는 모두 단단한 고통의 항체를 갖고 있을지 모른다. 그 표정에 낯익은 내 모습이 있는지 잘 살펴보자. 고통의 극점에서 마르거나 뒤틀려 겉은 망가졌으되 내면은 밝아진 바로 그 얼굴 말이다.

 지독한 가뭄을 지나온 나무들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한가하게 푸른 가지를 흔들고 있다. 가뭄은 빠르게 잊힐 것이고 나이테에나 희미하게 기록이 남을 것이다. 그러나 나무들은 제 안에서 좀 더 단단해졌을 것이다.

김기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