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선 병원 16곳 “응급실 문 닫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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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응급실. 내과·외과 등 개별 진료과 전문의가 응급실 당직을 서게 한 응급의료법 시행규칙 개정안이 이날부터 시행됐다.

 휴일이지만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들로 응급실은 빈 침대가 없을 정도로 붐볐다. 이날 새벽 당직을 맡은 박창배(응급의학과) 교수는 “심근경색 환자가 실려와서 새벽 2~3시쯤 병원에 대기 중이던 순환기내과 전문의를 호출했다”며 “(전문의가) 수술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한 뒤 약물로 치료했다”고 말했다.

 이날 수도권 대형병원들은 큰 혼란 없이 응급실을 운영했다. 전문의 인력이 충분한 대형병원은 이전부터 응급환자가 많은 진료과는 레지던트(전공의)뿐만 아니라 전문의도 당직을 세워 왔기 때문이다. 다만 이날부터 각 병원 응급실엔 진료과별 전문의 당직 근무표가 새로 생겼다. 개정 법령에 따라 당직 전문의 명단을 응급실에 게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부 병원에선 근무 부담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경기도의 한 대학병원 내과 레지던트 김모(30)씨는 “첫날이라 괜찮지만 레지던트나 전문의 수가 적은 일부 과는 오래 버티기 힘들 거라는 걱정이 많다”고 전했다.

 하지만 지방 중소병원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일부 병원은 응급실 폐쇄까지 고려할 정도다. 한 지방 병원 관계자는 “당직 시스템을 갖추려면 전문의를 더 확보해야 하지만 지방 소도시에선 높은 연봉을 제시해도 전문의를 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법령상 전문의 당직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 과태료 200만원이 부과된다.

 최근에는 그나마 있는 의사들조차 “응급실 당직과 외래 진료를 모두 다 소화하기에는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다”며 사표를 내고 있다. 지역응급의료기관으로 지정돼 운영 중인 경남 C병원은 최근 정형외과 전문의 3명 중 2명이 사표를 냈다. 전문의가 1명씩인 다른 진료과 의사들도 “이대로는 안 된다”며 병원에 대책 마련을 요구한 상태다.

 이 병원 응급실 전담의사인 양모 과장은 “이 상태라면 환자가 오면 무조건 상급병원에 이송하는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이 병원의 박모 원장은 “차라리 응급실 문을 닫는 게 나을 것 같아 심각하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경남도 의사회가 도내 44개 응급의료기관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36%(16곳)가 “응급의료기관 지정을 반납하겠다”고 답했다.

 이런 움직임은 타 지역 중소병원으로도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지방응급의료 체계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 백성길 중소병원협회 회장은 “시골 지역 병원들이 응급실을 접어버리면 지역응급의료 체계는 다 무너지고, 상급병원에만 환자들이 몰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321곳인 지역응급의료기관은 응급의료의 실핏줄에 해당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보건복지부는 “앞으로 3개월 동안은 홍보·계도기간으로 운영하고 행정처분(과태료)을 유예하겠다”고 최근 밝혔다. 복지부 정은경 응급의료과장은 “응급의료기관이 충실히 준비해서 최적의 조건을 갖출 시간을 주고 의료 현장에서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익명을 요구한 대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국회에서 법이 개정됐더라도 복지부가 시행령이나 규칙을 현실에 맞게 잘 조정했어야 했다”며 “지금이라도 보완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개정 응급의료법은 2009년 전혜숙(민주통합당) 전 의원이 ▶당직 전문의 직접 진료 ▶위반 시 과태료 200만원 등의 내용을 담아 발의했다. 복지부는 법 통과 뒤 시행령·시행규칙 개정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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