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를 주는 법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81호 30면

발레는 몸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이고, 표현을 통한 수련으로 아름다운 몸을 만드는 배움이기도 하다. 나는 표현과 수련의 수준이 가장 높다는 국립발레단의 수석무용수이자 국립발레단 부설 아카데미의 교장을 맡고 있다. 발레단 연습실에서는 지적을 받는 무용수이자 아카데미 연습실에서는 지적을 하는 엄마 같은 역할이다. 발레단에서는 내 스스로 잘하기 위한 수련을, 아카데미에서는 모두를 잘하게 이끄는 두 가지 상반된 경험을 동시에 하고 있다. 이 경험은 내게 무용수로서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부설 아카데미는 발레학교다. 이곳에서는 많은 아이가 무용수의 꿈을 간직한 채 열심히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들 중 누군가는 훌륭한 예술가가 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평생 몸이 소중하게 기억할 유연함과 건강한 비례를 선물로 간직하게 될 것이다. 그 두 가지 길은 모두 의미 있고 아름답기에 나는 각자의 인생에 어떤 가치로 남게 되건 발레가 그들에게 ‘의미’가 될 수 있도록 내 역할을 고민한다.

얼마 전이었다. 아이들의 작품 리허설을 봐주다 한 친구를 울리고 말았다. 그 아이도 알고 있고 나도 알고 있는 단점을 내가 끄집어낸 것이다. 더욱이 이제 겨우 13살인 그 친구는 자신의 단점을 알고 고치려고 노력 중이었기에 내 말이 가시처럼 마음에 박혔을 것이다.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말하는 나도 편하지 못했다. 달래면 달랠수록 내 앞에서 더 서럽게 우는 그 친구를 꼭 안아주며 “너는 할 수 있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24년 전 내가 발레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발레를 하기 전까지는 먼지 같은 아이였던 내가 생애 처음으로 무엇을 잘한다는 칭찬을 받은 이후 발레에 대한 열정이나 자세는 그 어떤 프로 무용수 못지않다는 맘을 가지고 있을 때였다. 클래스 도중 선생님께서 음악을 멈추시더니 그 많은 아이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지영아, 다리 모아봐. 어떡하면 좋니! 다리가 휘어서 너 다리 사이에 기차 지나가겠다.”

얼굴이 화끈거린 것은 물론이었거니와 이것이 무슨 사형선고와 같은 말인가. 하지만 그 다음 이어지는 선생님의 말씀은 영화에나 나올 법한 반전이었다.
“괜찮아. 발레 열심히 하면 휜 다리도 예뻐질 수 있어. 발레만 열심히 하면 다 고쳐져. 할 수 있지?” 그 뒤로 나는 선생님의 그 두 번째 말씀만 떠올리며 오직 그 말씀만을 열심히 믿고 지금까지 발레를 해왔다. 다리가 휘었다는 얘기는 쏙 들어갔으며, 무용수로서는 커다란 콤플렉스일 수 있었던 다리의 단점을 나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관객들은 나의 다리 동작을 김지영의 연기 중 가장 아름다운 표현력으로 받아들여주기까지 하며 오늘의 위치에도 이르렀다. 그 당시 선생님께서는 많은 아이들 앞에서의 지적뿐만 아니라 용기도 함께 주셨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와서 그 친구에게 말하고 싶다. 지금 네가 흘리는 눈물은 절대 헛되지 않고 언젠가는 아름다운 꽃을 피울 약속이 될 것이라고. 24년 전 선생님께서 내게 주셨던 것처럼 나의 가르침에도 지적과 격려의 균형이 늘 함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내가 그랬듯, 한마디 격려에 그 힘든 과정을 버티는 아이의 마음을 기억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아카데미와 발레단을 오가며 느낀다. 내가 잘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잘하게 이끄는 일은 정말 다르고 지적과 격려는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난 또 느낀다. 경쟁을 통해 지금의 자리까지 성장을 해왔지만 우리는 하나의 공연을 함께 만드는 마음을 배우는 것이라고. 발레는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경쟁의 세계다.
하지만 발레의 세계에서 경쟁을 이긴다 해도, 최고가 된다 해도 우린 항상 동료 무용수들과 전체공연을 함께 완성해야 한다. 요즘 같은 경쟁시대에는 가르치는 사람도, 비판하는 사람도, 꾸짖는 사람도 많지만 용기를 주는 사람은 점점 보기 힘들다. 격려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어려운 상황을 이겨 나가는가.
사회도 마찬가지다. 최고가 된 사람도, 경쟁에서 이긴 사람도 우리가 사는 사회라는 공연은 모두가 함께 완성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김지영 러시아 바가노바 발레학교를 졸업하고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를 역임했다. 1999년 화관문화훈장을 받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