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영화 친구 배창호와 안성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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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통기타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던 서울시청 뒤의 어느 다방에서 배창호(48) 감독은 배우 안성기(49) 씨를 처음 만났다.

배감독은 이장호 감독 밑에서 조감독을 할 때였고 꽤 이름을 날렸던 아역배우 출신의 안씨는 뚜렷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방황' 하던 시절이었다. 마침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날' 에 안씨가 캐스팅된다는 얘기가 오갈 때였다.

"무채색의 연기, 우수 어린 얼굴, 지성적인 이미지. 딱 보고 크게 될 배우란 느낌이 오더라구요. " 배감독이 조감독으로서 안씨를 본 첫인상은 그랬다.

하지만 안씨가 배감독을 본 인상은 좀 의외다.

"영화계에 들어올 사람이 아닌데…" 라는 생뚱한 생각이 들었던 것. 유난히 털털하고 때묻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터에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는 소릴 듣자 영화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둘이 80년대를 지나온 길을 살펴보면 사람은 둘인데 발자국은 하나였다고 할 정도로 닮아 있다. 배감독이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 (82년) 에 안씨를 주연으로 끌어들인 이래 10년간 꼭 열 두편의 영화를 함께 했다. 8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흥행 감독이란 별명을 가진 배감독의 영화에 안씨가 모조리 주연을 맡았으니….

바다를 찾아 무작정 달아나던 병태와 벙어리 춘자의 기억이 애틋한 '고래사냥' (84년) , 배감독의 작품 중 가장 화려한 영화로 꼽히는 '깊고 푸른밤' (84년) , 과감하게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안녕하세요 하나님' (87년) 등. 아련한 추억을 되살려주거나 시도가 신선했던 이 영화들의 중심엔 배창호.안성기가 있었다.

왜 둘이서만 영화를 했느냐고 묻자 둘 다 "글쎄요" 라며 뚜렷한 대답을 못했다. 더 다그쳤더니 "작품을 끝낸 뒤 다음 작품을 얘기하다보면 배감독은 저를 기용할 욕심이, 저는 그 작품을 꼭 해보고 싶은 마음이 서로 생긴 것 때문이죠" 라며 안씨가 마무리를 지었다.

80년대에 비해 조용했던 90년대를 보낸 배감독이 '흑수선' 이란 영화를 들고 다시 영화판으로 돌아왔다. 안씨가 함께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천국의 계단' (91년) 이후 꼭 10년 만이다. 그 사이 배감독은 독립프로덕션을 만들어 직접 제작과 감독을 맡아 '젊은 남자' (94년) '러브스토리' (96년) '정' (99년) 등 세 편을 찍었다. 안씨와 헤어진 10년은 실험과 도전의 세월이었던 셈이다.

태원엔터테인먼트가 제작을 맡은 '흑수선' 은 형사가 살인범을 쫓는 추리물로 제작비 40억원에 이정재.이미연 등 인기스타가 출연하는 블록버스터형 영화다.

"이제 폭넓은 대중영화를 하고 싶더라구요. 제작 여건이 나아져 해볼만해요. 그 동안 영화를 보는 안목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걱정이 되지만 흥행에는 정말 자신이 있어요" 라는 배감독의 목소리에선 힘이 강하게 느껴졌다.

"언젠가는 함께 할 줄 알았죠.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을 줄은 몰랐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10년이 가더라구요. 그 동안 젊은 감독들과 일을 많이 했는데 촬영장을 압도하는 배감독의 화이팅이 여러번 생각났어요. 무엇보다 이번 영화는 여러가지로 옛날과 많이 달라 가슴을 설레게 하는군요. " 안씨 역시 '흑수선' 얘기가 나오면 다소 상기되는 표정이었다.

매 사에 열광적이면서 결정이 빠른 배창호 감독에 비해 차분하고 선택의 순간에선 항상 신중한 배우 안성기. 국이 있어야 밥을 먹는 감독과 마른 반찬을 고집하는 배우로 20여년을 지내왔기에 둘의 사이가 벌어지지 않고 오늘까지 지속되는 것은 아닐까.

한창 날리던 80년대에 비해 배감독도 많이 변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술과 담배를 끊었다. 배감독은 "이제 좀 차분해지려구요. 모처럼 안형을 만났는데 그 동안 서로 다진 연륜과 깊이를 관객에게 느끼도록 해야죠" 라며 대중을 만날 준비를 단단히 했다.

"요즘 중견 감독이 없다는 푸념이 충무로에 파다합니다. 그걸 배감독이 달래줘야 합니다. 제가 배감독을 알잖아요. 이번에는 아마 큰 기대를 걸어도 좋을 겁니다. " 안씨는 그렇게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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