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영하의 영화 낚시 - '친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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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는 묘한 영화다. 볼 때는 즐거운데 보고나서 누군가 '그게 무슨 영화냐' 고 물어온다거나 이런 글을 써야한다거나 하면 묘해지기 시작한다.

그렇다. 참 묘하다. '친구' 에는 아무 것도 새로운 것이 없다.

오랜 친구들이 오래된 도시에서 오래된 직업인 깡패가 되어 대단히 오래된 죄, 살인을 저지르고 매우 오래된 처벌장소인 교도소로 끌려간다는 이야기다.

한때 친구였던 이들이 멀어지고, 아니 멀어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서로를 죽여야만 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낯설지 않다. 그렇다.

'친구' 에는 아무 것도 새로운 것이 없다. 그런데도 '친구' 는 새로워 보인다. 그리고 묘하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들.

"그런데 동수는 누가 죽인 거예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준석이 동수를 죽이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그랬을 리가 없다' 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 이런 오해들이 발생하는 걸까?

그것은 영화 '친구' 가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빈틈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드라마는 여기저기서 삐걱거린다.

여주인공(이라고 말하기엔 조금 민망한) 진숙은 극후반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버리고 중증 마약중독자였던 준석은 돌연 말끔한 조직인으로 거듭난다.

동수가 장의사인 아버지의 대를 잇지 않겠다고 패악을 부린다는 설정도 사족으로 보였다(한국의 영화서사들은 인물을 설명하는 데 있어 지나치게 가족과 유년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

아버지가 장의사가 아니었어도 동수는 깡패가 됐을 것이며 그렇다 해도 별 무리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깡패 준석이 '친구' 의 뜻을 한자로 풀어주는 대목은 어색했고 면회장의 준석과 상택이 손을 마주치는 장면은 오버였다. 결정적으로, 이 영화에선 준석과 동수의 관계가 잘 해명되지 않는다.

"내가 니 시다바리가?" 로 요약될 수 있는 이 둘의 관계야말로 묘하다.

"그 둘, 친구 맞아요?" 그렇다. 그 둘은 친구가 아니다.

동수는 정말로 '시다바리' 였다. 감독이 막판에 여러 형태로 봉합을 시도하지만 그래도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관계는 지식인 상택과 깡패 준석 뿐이다.

그나마도 서로의 삶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그렇기에 단란주점에서 '단란하게' 놀 수 있는, 그래서 평생 서로에게 칼 한 번 휘두를 일 없는 사이다.

그런 면에서 '오래 두고 가까이 하는 벗' 이라는 친구의 한자풀이는 아이러니컬하게 들렸다. 영화 속엔 그런 친구가 없다. 오래 두다가 증오하거나(동수와 준석) 멀리 있기에 그리워하는 벗(준석과 상택) 이 있을 뿐이다.

아마도 이런 빈틈, 혹은 과장들은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졌다는 데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현실은 때로 허구보다 드라마틱할 수 있지만 대체로 허구보다 허술하다.

그 허술함, 삐걱거림, 그리고 실화의 무게가 이 영화를 장르적 관습에서 조금씩 이탈시킨다.

그 때문에 영화는 누아르도 휴먼드라마도 액션도 아닌 어딘가에서 배회하고 있다.

그게 바로 이 영화의 이상한 매력이다. 정말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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