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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가 들어선 미지의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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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일러스트=박용석]
김종수
논설위원

미래는 늘 예측하기 어렵지만 현재의 상황이 어려울수록 그 불확실성이 더 커지는 경향이 있다. 한국 경제가 처한 상황이 꼭 그렇다. 경기가 장기간 부진을 면하지 못하는 가운데 언제 회복될지는 가늠하기 어렵고, 그로 인한 불확실성과 불안감이 투자와 소비의 발목을 잡는다. 투자와 소비의 부진은 성장 둔화와 경기 침체를 부르고, 이는 다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문제는 이런 악순환의 양태가 일반적인 경기순환 과정이나 돌발적인 해외 악재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닐지 모른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는 그동안 갖가지 역경과 위기를 이겨내고 줄기차게 성장해 왔다. 1970년대의 오일쇼크와 97년의 외환위기,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르기까지 다소의 굴곡과 이탈은 있었지만 이내 성장궤도에 복귀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이번엔 왠지 달라 보인다. 우선 위기 뒤에 곧바로 회복해온 과거의 V자형 반등의 탄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여기다 성장률 곡선이 잠재성장률 궤도를 이탈한 뒤 점점 더 하락하는 이상 행태가 고착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혹시나 한국 경제가 유례없는 장기 침체와 구조적인 저성장의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드는 이유다. 만일 그렇다면 이 길은 한국 경제가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길이다. 과거의 처방과 해법으론 본래의 궤도로 영영 되돌아올 수 없는 새로운 길에 접어들었는지 모른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의심할 만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세계 경제가 동반 침체하는 바람에 수출에서 활로를 찾기가 어렵다. 오일쇼크 뒤에는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한 해외건설 특수가 있었고, 외환위기 때는 선진국 경기가 좋았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세계적인 정책공조를 통해 경기를 부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미국과 유럽이 함께 주저앉은 데다 중국을 포함한 신흥국들마저 성장의 엔진이 식고 있다. 국제적인 정책 조율을 이끌어낼 글로벌 리더십도 보이질 않는다. 과거와는 달리 당분간 수출에서 성장의 동력을 찾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내수라도 기대할 게 있어야 할 텐데 이마저 여의치 않다. 전통적인 내수산업은 이미 수출대기업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지 오래고, 빚더미에 올라앉은 가계는 자산가치의 하락이 겹치면서 소비의 의욕을 상실했다. 수출과 내수가 동시에 부진한 상황에서 경제가 성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고 성장률이 떨어지는 구조가 고착되고 있는 것이다. 메릴린치는 최악의 경우 올해 한국의 성장률이 2%를 밑돌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올 상반기 성장률이 3%에 못 미치는 것으로 드러나자 한국은행은 급거 기준금리를 낮췄고, 정부는 부랴부랴 대통령 주재로 내수 진작을 위한 끝장토론을 열었다. 어떻게든 경기를 살려보겠다는 다급함과 초조함이 엿보인다. 그러나 진단이 정확해야 제대로 된 처방이 나오는 법이다. 만일 작금의 경기부진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인 저성장 국면이라면 한은과 정부의 단기 대증요법은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어차피 상당 기간 저성장이 불가피하다면 단기적인 부양책보다는 장기적인 체질 개선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저성장을 전제로 경제 운용의 틀을 새로 짜야 한다. 재정관리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경기부양을 위한 추경 편성보다는 중장기적으로 재정의 체력을 보강하기 위해 균형재정을 지향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내수 진작도 인위적으로 돈을 풀어 소비를 부추기기보다 규제 완화를 통해 고부가가치형 서비스업을 키우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임기 말에 힘 빠진 정부가 무슨 근본대책이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고 연임에 대한 기대도 없는 단임 대통령의 임기 말 정부이기에 더 이상 눈치 볼 것 없이 소신껏 일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눈앞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한국 경제의 장래를 위해 쓴 약을 처방했노라고.

 대권의 희망에 부풀어 연일 장밋빛 공약을 쏟아내는 여야의 대선주자들도 생각을 바꿔야 할지 모르겠다. 누가 대통령으로 뽑히든지 내년 2월 MB정부로부터 넘겨받을 한국 경제의 색깔은 잿빛 일색일 공산이 크다. 저성장 기조가 굳어진 한국 경제는 화려한 복지 약속을 뒷받침할 여력이 부족할 것이고, 번듯한 일자리를 주겠다는 굳은 다짐도 무색해질 것이다. 재벌을 패대기쳐서 경제민주화를 이루겠다는 호언도 얄팍해진 주머니에 허기진 서민들의 불만을 달랠 수는 없을 것이다. 벌써부터 저성장의 질곡에 빠져 허우적댈 새 대통령의 눈물겨운 몸부림이 눈에 보일 듯하다. 아무런 고통 없이 한국 경제를 성장의 궤도로 다시 올려놓을 초능력의 메시아는 없다.

 고도 성장의 가도를 숨가쁘게 달려온 대한민국은 이제 저성장이라는 미지의 길을 스스로 헤쳐나갈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 길이 아무리 험하고 멀지라도 견디고 가는 수밖에 없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