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어슬레틱스 역사 (2) - 코니 맥의 은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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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참담했다. 1914년 99승을 올렸던 어슬레틱스는 이듬해 109패를 기록했다. 또한 1916년에는 아직까지도 아메리칸리그의 기록으로 남아있는 117패(36승)를 당했다. 무려 7년동안 계속된 '꼴찌행진'은 1921년이 되서야 끝났다.

어슬레틱스가 늪에서 탈출한 것은 1924년 알 시먼스를 영입하면서였다. 시먼스의 영입을 팀 재건의 신호탄으로 삼은 맥은 1925년 마이저리그 최고의 팀이었던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선수들을 싹쓸이했다. 이 때 어슬레틱스가 사온 선수들은 역대 최고의 좌완투수로 꼽히는 레프티 그로브를 비롯, 조지 언쇼, 조 볼리, 맥스 비숍 등이었다.

또한 맥은 5만달러를 주고 퍼시픽코스트리그 포틀랜드로부터 미키 코크린을 사왔다. 그러나 맥이 했던 최고의 투자는 2천5백달러로 지미 팍스를 건진 일이다. 당시 팍스를 데리고 있던 홈런 베이커는 그를 뉴욕 양키스에 팔려 했다. 하지만 이미 루 게릭을 보유하고 있던 밀러 허긴스 감독은 이를 거절했고, 팍스는 어슬레틱스의 차지가 됐다.

1925년 어슬레틱스는 88승 64패의 성적으로 워싱턴 세너터스에 이은 리그 2위에 올랐다. 무려 10년만에 맛보는 5할 승률이었다.

1927년부터 양키스와의 혈전이 시작됐다. 당시 양키스에는 베이브 루스-루 게릭-밥 뮤젤-토니 라제리의 '살인 타선'이 버티고 있었다. 1927년 양키스는 158개의 팀홈런을 기록했는데, 나머지 7개팀의 평균 팀홈런수는 40개에 불과했다.

초반에는 양키스가 우세했다. 양키스는 1927년과 1928년 어슬레틱스를 리그 2위로 밀어내고,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했다. 하지만 다음 3년은 어슬레틱스의 몫이었다.

1929년 어슬레틱스는 타점왕(157타점) 시먼스를 비롯한 6명의 선수가 79타점 이상을 올리는 고른 공격력으로 양키스보다 18경기가 앞선 104승을 올렸다. 또한 월드시리즈에서는 오랜만에 올라온 시카고 컵스를 4승1패로 간단히 제압했다.

그로브가 다승(28) · 방어율(2.54) · 탈삼진(209) · 승률(.848) · 세이브(9)를 휩쓸었던 1930년, 어슬레틱스는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꺾었다.

1931년 어슬레틱스는 프랜차이스 기록인 107승을 거뒀지만, 페퍼 마틴이 맹타를 휘두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의해 3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을 저지당했다.

1932시즌을 2위로 마친 후, 맥은 다시 선수들을 팔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우승을 당연하게 생각한 어슬레틱스 팬들은 경기장을 찾는 일이 뜸해지기 시작했고, 여기에 대공황이 맥의 인내심을 자극했다. 결국 맥은 두번째 '점포정리세일'을 단행했고, 1935년부터 1950년까지 어슬레틱스는 10번의 꼴찌와 2번의 7위를 차지했다.

출범 당시 벤 존슨으로부터 주식의 1/3을 배정받았던 맥은 1940년까지 구단의 거의 모든 지분을 획득했다. 1946년 맥은 자신의 소유분을 세 명의 아들에게 나눠주었다.

마치 견훤의 세 아들과도 같았던 이들은 이 때부터 치열한 대권다툼에 들어가더니, 1950년에는 88세의 노부를 강제은퇴시켰고, 1954년에는 구단을 시카고 출신의 아놀드 존슨에게 팔았다. 어슬레틱스가 최고의 시장 중 하나인 필라델피아를 포기한 것은 바로 존슨의 결정이었다.

캔자스시티에서의 어슬레틱스는 13년동안 10명의 감독이 교체되는 등, 마치 멸망직전의 로마제국과도 같았다. 1960년에 팀의 소유권을 얻은 찰스 핀리는 결국 1967년 캔자스시티를 떠나 서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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