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숲 사이 상설공연무대 '봄 기지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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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 셋째주 토요일 오후 덕수궁에 햇살이 따사롭게 눈부실 때면 청자켓·청바지에 모자를 쓰고 배낭을 맨 70대 '청년'의 모습이 어김없이 눈에 띈다. 덕수궁 중화전 앞뜰에서 열리는 서울팝스오케스트라의 야외 무료음악회에 5년째 거의 빠지지 않고 나타나는 열성 관객이다.

공연시간 2시간전부터 시작하는 리허설도 빼놓지 않으니 거의 너댓 시간을 덕수궁에서 보내는 셈이다. 공연이 끝나면 가끔씩 출연진에게 음료수를 대접할 때도 있다. 다음 공연 프로그램과 출연진까지 추천하는 적극성을 보이기도 한다.

지휘자 하성호씨는 그의 추천을 받아들여 오는 21일 오후 3시 공연에 베이스 나운규씨를 초청했다. 보온병에 뜨거운 커피를 담아와 지휘자에게 권하는 30대 중반의 주부팬도 있다.

올해 10주년을 맞는 '덕수궁 가족음악축제'는 고정팬이 생길 정도로 서울시민들에게 인기다. 지난 10년간 40만여명이 다녀갔다. 올해는 중화전 재건공사로 덕수궁 미술관 앞 분수대 광장으로 연주 장소를 옮겼고 5~6, 8~9월엔 일요일에도 공연을 한다. 말 오후 한적한 도심에서 고궁 산책과 무료음악회·미술관 관람을 함께 즐길 수 있어 시민들은 물론 인근 호텔에 투숙 중인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필수 코스로 자리잡았다.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3시 남산에 위치한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변리사 김모씨(58)가 친구들을 데리고 로비에 들어선다. '완창 판소리' 무대에 단골 관객이 된지 벌써 5년째다.

국내 정상급 명창들이 '심청가' '수궁가' '춘향가' '적벽가' '흥보가' 등 판소리 다섯마당을 짧게는 2시간, 길게는 6시간씩 완창하는 이 공연은 국내 상설공연으로는 최장수 무대. 장안의 내로라하는 귀명창들이 일찌감치 앞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얼쑤" "그렇지"를 연발한다.

판소리 눈대목을 여러 명이 나누어서 공연하던 '판소리 감상회'가 완창무대로 바뀐 것은 1985년부터. 3월의 첫 무대는 성창순 명창이 '심청가'를 불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공연장에서 판소리 완창을 듣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후부터는 이 무대를 거치지 않으면 명창 행세를 하기 힘들어졌다. 방송이나 무대에서 눈대목만 듣느라 성이 차지 않던 귀명창들이 판소리의 진수를 즐길 수 있는 기회다.

간판급 명창들은 첫 무대 아니면 마지막 무대를 고집한다. 명창 박동진옹이 86년(적벽가)·87년(배비장전)·88년(적벽가)·89년(춘향가)·91년(수궁가)·98년(수궁가)·99년(적벽가)에 첫 무대를 장식했고, 안숙선 명창은 97년(흥보가)·99년(수궁가)·2000년(적벽가)에 이어 올해도 '심청가'로 피날레 무대에 선다.

오후 8시 덕수궁 돌담길 옆 정동극장(4백석)앞에는 어김없이 관광버스가 서 있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이곳에서 열리는 국악상설무대에 찾아온 외국인 단체 관광객들이다. 국내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모습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97년 국내 최초로 외국인 대상으로 전통문화 프로그램을 관광상품화한 무대로 외국인들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 공연이 끝나고 쌈지마당에서 벌이는 뒷풀이가 더 재미있다. 출연진과 함께 기념사진도 찍고 전통차도 대접한다.

출범 당시는 매주 화·금요일 2회로 시작했으나 지난해 4월부터는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공연을 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해가 바뀌어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오랜 친구처럼 언제나 나를 반겨주는 무대가 있다. 무대와 객석의 뜨거운 교감 후엔 출연자와 관객이 어울려 따뜻한 차와 대화를 나누며 어울릴 수 있는 여유가 바로 상설공연의 매력이다.


겨우내 잠시 쉬던 상설공연이 봄철을 맞아 다시 기지개를 펴고 있다. 야외에서 열리는 무료공연은 물론 각 공연장이 심혈을 기울여 마련한 프로그램들이 봄나들이 관객을 맞을 준비를 끝냈다.

국내 최장수 상설공연으로 올해 25년째를 맞는 국립극장의 '완창 판소리 무대'가 출범한 이후 각 공연장에서는 앞다투어 상설무대를 마련해 문화예술의 저변확대에 기여하고 있다.

전속단체를 두고 있는 공연장에서는 상설공연을 간판 프로그램으로 상품화해 외국인과 학생 등 단체관람객을 끌어들인다는 전략이다. 대부분 주말에 집중돼 가족 나들이에도 적격이다. 입장료는 1만원 내외로 저렴하고 무료 공연도 많이 있어 청소년들이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으로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5백석 미만의 소극장에서 열리는 공연이 대부분인 탓도 있지만 시리즈 공연으로 홍보·마케팅에 유리해 대부분 전석매진에 가까운 호응을 얻고 있다. 당일에 입장권을 구하려면 허탕을 치기 쉽다. 유료 공연의 경우 기획 시리즈로 1년치 공연일정이 일찌감치 발표되므로 여유있게 예매할 것을 권한다.

시리즈 티켓을 구입하면 푸짐한 할인 혜택도 누릴 수 있어 고정팬들이 많다. 가령 국립극장의 완창 판소리(2만원)에선 5회를 관람할 수 있는 5만원짜리 쿠폰 '얼쑤 티켓'을 발매, 이미 50매가 팔려나갔다.

평소에 접할 기회가 드문 전통예술 분야에 집중돼 있다는 것도 상설공연의 특징이다. 토요상설 국악공연 등 매주 3일을 상설공연에 할애하고 있는 국립국악원을 비롯해 국립극장·정동극장·한국의 집·서울놀이마당·국립민속박물관·경기문예회관·운현궁에서 전통예술 공연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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