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어렵다면서 부양책 안 꺼내 … 버냉키, 정치권 줄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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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벤 버냉키 의장이 17일(현지시간) 미 의회에서 경제 상황을 증언하는 장면이 뉴욕증권거래소 내부 스크린에 나오고 있다. [AP=연합]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연말 대선을 앞둔 공화·민주 양당의 협공에 시달리고 있다. 시장은 화끈한 경기 부양책을 고대하고 있지만 정치권의 전혀 상반된 압력 때문인지 묘한 줄타기만 계속하는 모습이다.

 버냉키는 17일(현지시간) 미 상원 은행위원회에 출석해 국내외 경제 상황과 금융·통화 정책 방향에 대해 증언했다. 하지만 말 따로, 행동 따로의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야당인 공화당으로부터 경기 부양은 절대 안 된다는 경고를 받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경제 실정을 희석시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공화당은 내년 자기들이 정권을 잡은 뒤 본격 경기 부양에 나서 주길 바란다. 반대로 여당인 민주당은 Fed가 분명한 메시지를 시장에 전해야 한다며 버냉키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정책 실기를 하면 경제 회생을 위해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압박한다.

 경제 여건만 본다면 버냉키가 ‘3차 양적완화(QE3)’라는 경기부양 카드를 꺼낼 때가 됐다. 연초 떨어지는 듯하던 실업률은 8%대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물가는 지나치게 안정돼 오히려 디플레이션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시장에선 다음 달 캔자스시티 연방준비은행 주최 경제정책 심포지엄(일명 잭슨홀 미팅)을 주목하고 있다. 버냉키가 2010년 2차 양적완화 정책을 발표한 것도 잭슨홀 미팅에서였다. 다만 지난해에도 버냉키의 잭슨홀 미팅 개막연설에 기대가 모아졌으나 끝내 그는 QE3를 언급하지 않았다.

 8월을 넘기면 미국의 대선 레이스가 본격화한다. 시간을 끌수록 Fed의 정책도 정치바람을 탈 수밖에 없다. 여야 대립이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버냉키가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행동에 나서는 건 점점 어려워진다는 얘기다.

 버냉키의 애매한 태도에 국제 금융시장은 춤을 추고 있다. 17일도 그랬다. 이날 오전 은행위원회 증언에서 버냉키는 “경제지표들이 실망스러운 수준이며 특히 실업률 하락 속도는 절망스러울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제조업과 기업의 투자마저 다시 위축되고 있다고 토로했다.

 올 1분기엔 1.9%로 떨어진 경제성장률이 2분기엔 더 낮아질 것이란 어두운 전망도 내놨다. 여기다 올 연말 세금 감면 시한 만료와 내년 초 자동 세출 삭감으로 세금은 오르고 재정지출은 급격히 감소하는 이른바 ‘재정 절벽(fiscal cliff)’ 문제를 미 의회가 해결하지 못하면 미국도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필요하다면 추가 행동에 나설 준비가 돼 있다”는 원론적 입장만 되풀이했을 뿐 ‘QE3’에 대해선 끝내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다. 그러자 유럽과 미국 증시는 일제히 미끄러졌다.

 그러나 준비해 온 성명을 읽고 난 뒤 질의응답이 이어지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버냉키는 “실업률 추이에 따라 Fed 조치의 수위가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디플레 위험에 대해선 확실히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단호한 발언에 꺼져 가던 경기부양 기대가 다시 살아나며 증시도 반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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