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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세대 전투기, 아무거나 사자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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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정용수
정치부 기자

얼마 전 첨단 항공산업의 흐름을 살피기 위해 영국을 찾았던 성일환 공군참모총장의 말 한마디가 묘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성 총장은 현지에서 대사관 직원, 우리 정부 관계자들과 만찬을 하면서 “(차세대 전투기로) 아무거나 사 달라”고 했다고 한다. 정부 임기 말이니 거액이 들어가는 대형 국책사업은 차기 정부로 미뤄야 한다는 정치권의 압박을 의식해 기종 선정작업을 예정대로 진행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한 말이었으리라. 성 총장 자신은 ‘우리 영공을 지켜왔던 F-4와 F-5 전투기의 퇴역이 임박했으니 전력 공백이 우려된다’는 우국충정에서 말했을 수 있다. 또 보잉(F-15SE), 록히드마틴(F-35), 유럽항공방위우주산업(EADS·유로파이터 타이푼)이 각각 내세우고 있는 전투기들의 성능이 엇비슷하므로 그중 무엇을 선정해도 문제없다고 인식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찬장에서 그의 말을 직접 들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공군을 지휘하는 총장의 입에서 “아무 전투기나 사달라”는 표현이 나온 건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와 해외 항공기 제작사들이 치열한 협상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선 더욱 거슬리는 발언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번 사업이 8조3000억원이라는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무기 도입 프로젝트란 점을 고려하면 ‘아무거나’라는 표현은 부적절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심사 평가의 객관성과 진지함이 의심받을 소지도 있다. 우리 국민들의 막대한 혈세가 들어가는 최첨단 전투기를 되도록 싸게 사려고 동분서주하는 사업담당부서 직원들은 힘이 빠질 법도 하다.

 차세대 전투기 도입은 단순히 전투장비를 아무거나 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성능만 따져서 될 일도 아니다. 부품의 안정적 공급, 정비, 기술 이전, 국내 생산 범위 등 여러 항목이 고루 들어맞아야 한다. 특히 정부는 소형 전투기를 자체 생산하려는 계획(KFX)을 세우고 이참에 기술 이전을 기종 선정 조건의 하나로 내걸었다. 그래서 우리가 돈 내고 사면서도 이를 ‘사업’이라고 부르는 거다.

 지난 5일 차세대 전투기(F-X) 선정을 위한 입찰 제안서가 마감됐다. 조만간 응찰한 회사들의 전투기에 대한 성능 평가와 가격 협상이 예정돼 있다. 정부와 해외 제작사들 사이의 샅바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이다. 도저히 ‘아무거나’ 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상황이다. 어느 때보다 전략적 판단이 절실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사업에 직·간접적으로 관계 있는 공직자가 아무 말이나 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