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졸속 행정’으로 떨어진 국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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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장세정
정치부 차장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의 국무회의 졸속 통과를 둘러싼 청와대와 총리실, 외교통상부와 국방부, 나아가 국회의 대응 태도까지. 말 그대로 ‘총체적 실망’이다. 지금이 정권 말기임을 새삼 일깨워줬다.

 이 협정은 북한의 위협에 대비해 한·일 군사정보 교류의 필요성 때문에 정부가 지난해 초부터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것이다. 일본과는 긴밀한 협의를 해 왔고, 양국 정부 간에는 나름대로 공감대가 형성됐었다.

 그런데 정부가 국민의 반일(反日) 정서를 좀 더 세심하게 따지지 않고, 투명한 절차를 무시한 채 졸속으로 추진하는 바람에 중대한 오류를 자초했다. 일이 벌어진 다음엔 책임 회피, 꼼수, 말 바꾸기로 대응하다 파문을 더 키웠다.

 원래 주무 부처는 국방부다. 외교부와의 실무 조율을 거친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5월 말 일본에 가서 협정을 체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막판에 취소했다. 야당의 반발 기류에 멈칫했던 것이다. 이후 마무리 책임을 떠맡은 외교부에서는 “(국방부가) 비겁하게 발을 뺐다”는 불만이 흘러나왔다.

 ‘뜨거운 감자’를 넘겨받은 외교부는 가급적 상반기에 협정을 마무리하기로 일본과 협상을 서둘렀다. 외교부와 국방부 당국자는 지난달 21일 국회를 찾아 새누리당 진영, 민주통합당 이용섭 정책위의장을 각각 만나 협정에 대해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고 한다.

 일이 틀어진 건 여기서부터. 국회 접촉을 마치자 어느 정도 공감대를 얻었다고 착각한 정부는 이후 협정안을 일사천리로 처리하려 했다. 당국의 설명을 들을 때는 별 지적을 하지 않다가 뒤늦게 정치 공세를 벌이는 정치권도 잘못이지만, 정치인들의 그런 구태를 간파하지 못한 정부의 ‘미숙함’이 더 큰 문제였다.

 정부는 이명박 대통령이 중남미 순방(6월 17~27일)으로 자리를 비운 26일 국무회의에 비공개로 안건을 상정했다. 언론에는 비밀로 했지만 다음 날 드러나고 말았다. 비난 여론이 들끓자 일본과의 서명식 50분 전 취소 통보하는 외교적 결례를 범했다. 이 정부가 강조해온 ‘국격(國格)’을 안팎에서 스스로 떨어뜨렸다.

 더 가관인 것은 청와대·총리실·외교부·국방부 당사자들이 면피성 발언과 책임 떠넘기기를 하는 모습이다. 누구 하나 “잘못했다. 내가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러시아와도 체결했고, 중국과도 추진 중인 정보보호협정은 국익 차원에서 충분히 명분을 얻을 수 있는 사안이었다. 정부 당국자는 그동안 “철저히 국익 때문에 협정을 추진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협정이 좌초한 이상 누군가는 국익을 지켜내지 못한 책임을 지는 게 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