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대통령의 입' 9년] 10. 그리운 기자 시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 1970년대 초반 공화당 실세 의원으로 손꼽히다가 ‘항명 사건’으로 추락한 김성곤씨(오른쪽)와 또다른 실세였던 이후락씨.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4월 27일)와 제8대 국회의원 선거(5월 25일)를 치른 박정희 대통령은 6월 3일 김종필씨를 국무총리로 발탁하는 개각을 했다. 나에게도 변화가 왔다. 나보고 청와대에서 같이 일하자고 권유했던 윤주영 대변인이 문공부 장관에 임명되어 떠나게 된 것이다.

윤 장관이 떠나고 나 혼자 청와대 대변인실을 지키고 있으려니 망망대해에 외로이 떠있는 범선같은 신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와대 조직도 선거체제에서 정상체제로 돌아간 지 오래됐다. 관료주의의 독버섯이 다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당시 내 눈에는 청와대가 참으로 괴이한 조직으로 보였다. 대통령을 향한 수직적 조직은 지나칠 정도로 발달되어 있었지만 수석비서관들 간의 횡적인 협조체제란 거의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수석비서관들 사이에 비밀의 장막이 너무도 두꺼웠다. '남의 집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려고 하지 말라'는 말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충성심 경쟁 위주의 조직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흥이 나지 않았다. 선거도 끝났고 외인부대의 임무도 끝났으니 다시 본집인 동양통신사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을 때 불상사가 하나 터졌다.

박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키 위해 서울에 온 애그뉴 미국 부통령이 주말에 박 대통령과 태릉골프장에서 골프를 쳤는데 공보실에서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때문에 기자실에도 알려주지 못한 것이다.

기자단에서는 "공보비서실은 뭐하는 놈들이냐"며 욕설이 대단했다. 아마 윤 대변인이 그대로 있었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언론계 경력으로 따지면 출입기자들은 모두 나의 후배 뻘이다. 그런데도 신참 비서관이라고 나를 얕보고 있는 것이었다. 나의 체면은 말이 아니게 구겨졌다.

나중에 알아보니 주말의 대통령 일정은 경호실에서 전담한다고 했다. 제기랄, 이런 법이 또 어디에 있담-. 의전실에서는 나 몰라라 태연하다. 더 이상 이런 수모를 겪으면서 청와대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본가라 여겨왔던 동양통신의 김성곤(SK) 사장을 찾아갔다. SK는 쌍용양회 등 기업을 경영하고 있었고, 공화당 국회의원인 실세 정치인이었다.

SK는 "니, 제 정신이가"라고 물었다. "남들은 거기 가지 못해 안달인데 나오겠다는 놈, 내 처음 봤다"며 "자리는 마련해 줄 수 있지만 다시 생각해 보거래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난감했다. 자유롭게 산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언론계로 돌아가고 싶다. 부대변인이고 비서관이고 다 싫다. 자유롭게 살자"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화당 간부가 청와대 소식통을 인용해 대통령 취임 이후의 정치 일정을 그럴싸하게 발설한 것을 어느 일간지가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한 사건이 발생했다. 기자실에서는 애꿎게도 공보비서실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김성진 전 청와대 대변인·문공부 장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