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세 정치인, 49명 의원 호텔로 불러 한명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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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일본 민주당 고시이시 아즈마(輿石東) 간사장과 만난 뒤 간사장실을 나서는 오자와 이치로 전 대표. 그는 이날 오자와 그룹 49명에게 탈당계를 요구했다. [도쿄=지지통신]

21일 오후 4시 도쿄 아카사카(赤坂)의 ANA인터콘티넨털 호텔. 35층 스위트룸에 무려 49명의 국회의원이 몰려들었다. 이른바 ‘오자와 그룹’ 소속 중의원.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70) 전 민주당 대표는 결의에 차 있었다. “여러분! 대의는 우리에게 있다. 국민은 그걸 안다. 각오를 다지고 굳게 단결하자.”

 인사말을 마친 그는 거실 옆방으로 옮겼다. 그때부터 한 명씩 호출이 시작됐다. 각 지역구 사정을 청취한 뒤 자신에게 ‘탈당계’를 미리 제출하도록 했다. 그야말로 정치 생명을 맡기며 충성을 맹세하는 혈판장(血判狀)이었다. 몇몇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유보했지만, 그들은 다음 날인 22일 또다시 오자와에게 호출당했다. 21일 참석하지 못한 자파 의원들에 대한 설득도 22일 하루 종일 이어졌다.

 26일로 예정된 소비세 인상법안 표결을 앞둔 오자와는 지금 벼랑에 몰려 있다. 그는 소비세 인상법안에 결사 반대다. 2009년 집권 당시의 공약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면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55) 총리는 야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의 동조를 얻어냈다. 법안 통과에 필요한 절대 과반수를 확보한 노다 총리 측은 오자와 그룹에 대해 “표결에 반대하면 제명 처분한다”는 강경 입장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 반대 입장을 거둘 수도 없다. 거두는 순간 자신의 지지 그룹은 와해되기 때문이다.

 궁지에 몰린 백전노장 오자와가 던진 마지막 승부수, 그건 ‘54명 확보 후 탈당’ 카드다.

 민주당에서 중의원 54명이 탈당하면 집권 민주당은 의석 과반수가 무너진다. 즉 야당이 내각 불신임안을 내고 야당 의원 전원이 가세하면 노다 정권은 붕괴된다. ‘54장의 혈판장’만 확보하면 신당을 창당하거나, 혹은 노다 총리의 막판 양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54명을 확보하지 못하면 오자와의 정치 생명은 사실상 끝난다.

 오자와는 아직 신당 창당을 공언하고 있지 않지만 대다수 일본 언론은 오자와의 신당 창당이 불가피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른바 오자와 그룹의 핵심 세력은 2009년 ‘민주당 바람’에 의해 당선된 초선 의원이다. 지역 기반이 취약하고 오자와 당시 간사장의 후광 하나로 당선된 이들이다. 다시 민주당 공천을 받는다는 보장이 없고 재선 가능성도 낮다. 이들은 “‘오자와 신당’으로 나가 ‘반 소비세 인상, 반 원전’이란 선명한 구호로 싸우는 게 훨씬 낫다”며 “표결 반대 후 즉각 신당 창당 선언을 하자”고 오자와를 압박하고 있다.

 다만 신당 창당에 소요되는 자금이 여의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국회의원 1인당 창당 비용이 1억 엔(약 14억4000만원)으로 일컬어지는 상황에서 오자와의 호주머니 사정은 예전만 못하다. 민주당의 ‘돈줄’ 역할을 해 왔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65) 전 총리가 신당 동참에 회의적인 데다 정당교부금도 내년이 돼야 지급되는 점도 큰 부담이다. 그래서 “노다 총리가 ‘제명’ 대신 ‘엄중 경고’로 징계 수위를 낮춰만 주면 54명 이상의 혈판장을 확보한다 해도 탈당하지 않고 싶은 게 오자와의 본심”이란 주장도 나온다.

◆‘고와시야’ 오자와=오자와는 그동안 세 차례 신당 창당을 했다. 1993년 6월 자민당을 뛰쳐나와 신생(新生)당을 만들었고 94년 12월 신진(新進)당, 98년 1월 자유당을 창당했다. 마음에 안 들면 부수고 새로 당을 만드는 그의 경력 때문에 그에겐 ‘고와시야(<58CA>し屋·파괴자)’란 별칭이 늘 따라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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