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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푼짜리 노여움을 버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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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정진홍
논설위원

# 얼마 전 세아제강의 이운형 회장이 모친상을 당해 문상을 갔다. 문상 온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돌아가신 분이 백수를 누리셨다 하여 ‘호상(好喪)’이라 했다. 예전 같으면 100세를 넘긴다는 것이 드물었지만 요즘엔 백세 넘게 사시고 세상을 뜨는 분들이 꽤 된다. 아마 점점 더 많아질 것이 틀림없다. 흔히 이런 현상을 두고 인간 수명이 연장됐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연장된 것이기보다 인간이 자기 본래의 수명에 다가간다고 말해야 옳을지 모르겠다.

 # 본래 ‘천간지지(天干地支)’, 즉 천간(甲 乙 丙 丁 戊 己 庚 辛 壬 癸)과 지지(子 丑 寅 卯 辰 巳 午 未 申 酉 戌 亥)를 결합시켜 만든 것을 육십갑자(六十甲子), 줄여서 육갑(六甲)이라 한다. 그 육십갑자가 한 바퀴를 돌아 다시 태어난 간지(干支)의 해가 돌아왔음을 뜻하는 게 환갑(還甲)이다. 그래서 61세(만 60세)의 생일이 자기 환갑이 된다. 그리고 이 환갑에서 한 해 더 나아가 62세(만 61세) 때의 생일을 흔히 진갑(進甲)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느 사석에서 금호아시아나의 박삼구 회장이 진갑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놨다. 진갑이란 말 그대로 새로운 갑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니 만 61세가 아니라 120세여야 맞다는 것이다. 일리도 있고 수긍이 가는 말이었다.

 # 예부터 동양의학에서는 본래 인간의 수명이 4만3200여 일, 약 120세라고 얘기해 왔다. 게다가 요즘 현대의학에서도 인간수명을 120세까지 연장시킬 수 있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다만 차이라면 한쪽은 본래 타고난 수명이 120세인데 제대로 양생(養生)을 못해서 수명이 짧아졌다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나날이 발전하는 유전공학과 의학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적절한 맞춤형 치료를 통해 120세까지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론 앞의 의견에 마음이 쏠린다. 인간 수명은 늘려가는 것이 아니라 찾아먹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인간 수명을 단축해 왔는가? 한마디로 ‘노여움’이다. 노여움은 분함에서 오고 그것이 분노를 낳는다. 쓸데없는 노여움은 자기 명줄을 끊는 칼이 되고 날 선 분노는 결국 내게 되돌아오는 부메랑이다. 그것들이 내 안에 암의 씨앗을 뿌린다. 따라서 마음에 노여움을 품어 그것을 쌓아가면 스스로 명줄을 끊는 것이 된다. 그러니 분함을 품지 않고 노여움을 없애는 것이 자기 명을 제대로 사는 지름길이다. 가만 보면 뭐 하나 넘어가주는 게 없는 사람이 있다. 나도 그랬다. 정말 피곤하다. 주변을 피곤하게 하고 세상을 피곤하게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엔 그 피곤함이 자신을 죽인다. 사는 데 너무 날 세워 팩팩거리면 어느 날 ‘팩’하고 쓰러진다. 신문기자 치고 오래 사는 사람 드물다고 하지 않던가. 그 말도 틀리지 않는 것이 팩팩거리고 날 세우다 결국 자기가 먼저 가는 거다. 그러니 웬만하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대범하게 넘어가주는 게 자기 명줄 유지하는 데도 중요하다. 그런다고 대세에 지장 없다. 오히려 내버려두고, 기다려주고, 때로 무관심한 게 더 잘될 수 있다. 자고로 노여움은 불이다. 자기 몸을 바싹 바싹 태운다. 초조하게 만들고 바둥거리게 만든다. 그러지 말자. 단지 오래 살고 싶은 욕심에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게 백해무익하기 때문이다.

 # 한쪽에서는 못 고치는 병이 없는 현대판 화타로, 또 다른 한쪽에서는 무면허 사이비 돌팔이로 몰려 법정에까지 서야 했던 106세의 장병두옹이 한때 반독재 민주화 운동 때문에 쫓기며 옥고를 치르고 결국엔 심신이 피폐해져 폐인의 지경에까지 몰렸던 김지하 시인에게 한 말이 있다. “살고 싶거든 서 푼짜리 노여움을 버리라”고! 그렇다. 서 푼 아니라 반 푼어치도 안 되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노여움을 끌어안고 스스로의 명줄을 조이는 미련한 짓거리일랑 이제는 그만 두자. 노여움은 버려야 마땅하다. 분토처럼 버려라. 그러면 그 자리에 새 생명이 움트리라.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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