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인수대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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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부끄럽지만 역사에 약하다. ‘나리나리 개나리’ 음률에 ‘태정태세 문단세’를 붙여 따라 부르게 한 초등학교 선생님의 주입식 교육에 힘입어 조선왕들의 묘호(廟號)를 겨우 외우는 정도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틈틈이 조선왕조실록 인터넷 사이트를 검색하며 역사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부녀자의 도리를 익히기 위해서(는 아니고 그냥 호기심에) 『내훈(內訓)』 같은 책을 찾아 읽기도 했다. 이번 주말, 마지막 회 방영을 앞두고 있는 JTBC 드라마 ‘인수대비’ 때문이다.

 ‘인수대비’는 세조의 며느리이자 덕종(의경세자)의 부인이며, 성종의 어머니이면서 연산군의 할머니인 소혜왕후(1437~1504)의 생애를 그린 사극이다. 처음엔 의경세자 역의 배우 백성현에 끌려 보기 시작했다가, 어느새 본방 사수를 위해 주말 약속을 전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역사와 허구를 섞고 또 섞다 안드로메다로 흘러가곤 하는 ‘퓨전사극’과는 달리, 폐비 윤씨가 어린 나이에 궁녀로 입궐했다는 내용 등 일부 픽션을 제외하면 ‘인수대비’는 비교적 사료에 충실한 작품이다. “올드(old)하다”는 초반의 평을 좋게 풀면 최근 보기 드문 정통사극이라는 이야기. 때때로 등장해 “실록에 적기를…” 하며 내용을 정리해주는 성우 유강진씨의 해설도 복고의 정감을 더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은 한 인간이 지닌 다각적 인격을 세심하게 조명했다는 점이다. 세조의 인간적 고뇌를 강조하거나 ‘모사가’로 알려진 한명회를 감이 뛰어난 정치인으로 그린 건 아주 새로운 접근은 아니다. 그러나 질투에 눈이 먼 광녀(狂女) 이미지의 폐비 윤씨에게서, 고관대작의 딸이 아니라는 콤플렉스와 사랑에 모든 것을 건 여인의 애통함을 끌어낸 것은 퍽 신선했다. 철저하고 비정한 원칙주의자로 보이는 인수대비가 아들과 손자의 슬픔에 공감해 고뇌하는 모습도 비중 있게 그려진다.

 뒤늦게 사극을 통한 역사공부에 눈을 뜨니, 일본의 사례가 새삼 부럽다. 공영방송 NHK에서 매년 초에 시작해 1년 주기로 방송하는 대하사극은 일본인들의 역사 교과서라 할 만하다. 올해는 어느 시대를 다룰까가 주요 뉴스가 되고 NHK 사극 주인공을 맡는 건 ‘정상급 배우’의 인증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다양한 사극으로 깊이 있게 역사를 접한다면 “훈민정음 해례본? 궁녀 소희가 치마폭에 썼던 거?”(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로 역사를 배운 한 친구)라는, (제발 농담이라 믿고 싶은) 오해는 사라질지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