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딸 치료 위해 가족 곁으로…”

중앙일보

입력

아이들은 오래 전부터 아빠의 특별한 케어를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었고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가족에게 돌아가려 합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인터넷 기업 CEO(최고경영자) 중 한 사람인 염진섭(47) 야후코리아 사장이 “오는 4월30일부로 대표이사직을 사임한다”며 지난 14일 오후 기자들에게 보내 온 이메일의 한 구절이다. 그는 “더 신경을 써야 하는, 사랑하는 아이들 문제가 있어서 정든 회사를 사직하게 되었다”고 썼다.

5월부터 야후코리아의 고문이자 이사회 멤버로 활동하게 되니 그가 야후코리아를 아주 떠나는 것은 아니다. 그 스스로 상근은 하지 않지만 야후코리아의 방향성과 비전의 정립 등 큰 그림 그리기에는 참여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가 투자한 한 회사의 CEO는 국내에서 야후의 설립자인 제리양 마케팅에 성공한 그가 미국 본사쪽의 보직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메일에서 “대학을 마치고 사회에 나온 지 25년, 앞만 보고 달려온 일중독증 가장의 뒤엔 너무나 많은 가족의 희생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가 이 말끝에 덧붙인 대로 일에 파묻혀 지내는 가장은 이 나라 대부분의 가정에서 일반화돼 있는 풍경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특별한 보호를 필요로 한다고 해서 누구나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사실 누구나 그런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야후코리아를, 설립 5년 만에 세계적인 인터넷 기업으로 키운 그는 스톡옵션을 받아 수백억대의 자산가가 됐다.

그는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1971년 대구 경북사대부고를 졸업하고 상경한 그는 대입시험에 낙방, 재수를 하는 동안 자취하는 친구에게 얹혀 지냈다. 친구의 서울대 교복을 빌려 입고 영어과외 아르바이트를 한 그는 이듬해 서울대 영문과에 들어갔다.

염사장은 IT조선의 박내선 기자에게 보내 온 답장에서 “하늘이 돈도, 명예도, 머리도 주셨지만, 건강하지 못한 아이를 주셔서 스스로 자만하지 못하게, 나쁜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천사까지 주신 걸로 저는 늘 생각하며 살고 있다”고 밝혔다. 이메일 클럽 회원들에게 보낸 글에서 박기자는 그의 메일을 받아 보고 마음이 아파 “그동안 수고하셨다”는 짧은 위로의 메일을 보냈다고 썼다. 그녀는 염사장의 사퇴의 변을 기사화하며 그의 프라이버시를 최대한 보호하기 위해 기자로서 고민했다고 털어 놓았다.

중앙일보 인물정보에 올라 있는 염사장의 종교는 불교, 가훈은 ‘기쁨·열정·꿈’이다. 그는 “격변의 전환기에 야후라는 전혀 새로운 첨단 비즈니스를 이끌어 가는 회사에서 일하며 디지털 세상을 꿈꾸게 된 건 참으로 행운이었고, 새로운 도전과 성취를 맛보는 희열을 느꼈다”고 이메일에 썼다.

그러는 동안
“유명해지고
인터뷰로 날 새는 줄 모르고 돈도 아주 많이
벌었는데도 무능한 아빠는 사랑하는
딸아이에게
아프면 그저 삼대 할머니에게 두 손 모아
비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다”고 메일에 첨부한 시에서 그는 고백했다. 그가 프랑스 파리서 열린 사장단 회의에서 처음 사표를 낸 게 99년 12월이고, 시 끄트머리에 2000년 3월13일이라고 돼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짧지 않은 고뇌의 세월을 보냈을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10년 전 희귀병을 얻은 큰딸(19)은 지난해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그가 사임의사를 밝힌 날 서울대병원에 입원을 했고, 미국서 치료를 받을 예정이다. 이 때문에 그는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친구들에게 사석에서 중국의 한의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오래 전 읽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이런 경구(警句)가 있었다.

“눈을 감는 순간 ‘더 많은 시간을 일에 파묻혀 지냈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더 많은 시간을 가족들과 보냈어야 했다’고 후회한다.” 특별한 보호는 아니더라도 가장의 특별한 관심을 필요로 하는 가족들은 누구에게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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