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스러운 기억 지워버릴 수 있는 세상 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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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독거미가 사람의 목덜미를 물려고 어깨를 기어 올라가는 사진을 젊은 여성이 본다면 어떨까. 깜짝 놀라 뇌리에 기억이 오래 남는 게 일반적이다. 놀라는 순간 눈 주변 근육이 떨리는 등 공포에 대한 미세한 반응도 나타난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 메럴 킨트 교수는 2009년 기억 각인을 방해하는 약물인 아드레날린 억제제를 그 독거미 사진을 한 번 본 여성에게 먹인 뒤 다시 사진을 보여줬다. 몇 번 그렇게 하자 24시간 뒤에는 깜짝 놀라는 신체적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첫 공포의 기억을 다시 꺼내 회상하는 것을 반복할 때에 아드레날린 억제제를 먹음으로써 공포 기억 자체가 지워진 것이다. 이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기억 삭제에 대한 첫 실험이다. 공포스럽거나 살인자가 범죄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는 시대가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는 한 사례이기도 하다.

교육과학기술부 뇌 연구 프론티어사업단(단장: 김경진 서울대 교수)은 이 같은 인간의 기억 메커니즘의 연구를 가능하게 한 영국 브리스톨 의대의 그레이엄 콜린그리지 박사 등 세계적인 뇌과학자들을 초청해 27~29일 제주도 샤인빌리조트에서 ‘뇌 연구 국제 컨퍼런스 2012’를 연다. 이 자리에서는 뇌과학의 현주소를 한눈에 조망해 볼 수 있다. ▶학습과 기억 ▶신경 줄기세포 ▶신경병증성 통증 ▶심리적 외상 ▶생체 시계 등을 다룰 70여 명의 국내외 뇌 과학자가 참여한다.

 컨퍼런스 기조강연을 하는 콜린그리지 박사는 1980년 대 초까지만 해도 심리학 영역에서나 다루던 기억을 현대 분자생물학 영역으로 전환한 과학자다. 그는 83년 뇌 신경전달 신호를 받아들이는 부분을 활동하지 못하게 하면 새로운 기억이 저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 밝혀냈다. 그의 연구가 기폭제가 되어 공포 기억을 인위적으로 재생하거나 각인된 기억도 회상하게 한 뒤 단백질 합성 저해제를 투여하면, 그 기억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초기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다.

 교육과학기수부가 올해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과학기술예측조사’에 등장하는 ‘뇌 기억 스캔(2031년 실현 예상)’도 이런 연구결과가 쌓이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을 스캔해 복사하듯 뇌를 스캔하면 뇌에 저장된 기억이 통째로 컴퓨터로 옮겨진다는 것이다.

 컨퍼런스에서 발표될 내용 중 하나인 뇌의 해마도 관심을 높이고 있다. 해마는 바닷속 해마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뇌세포가 태어나면서부터 지속적으로 감소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해마의 세포는 끊임없이 생성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기억 관문 역할을 하는 해마를 잘 자극하면 기억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내용도 소개된다. 해마가 망가지면 과거의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새로운 기억을 저장하지 못한다. 57년 미국의 한 남성은 간질 때문에 뇌 양쪽 해마를 잘라낸 뒤부터는 방금 전 본 의사도 처음 만나는 것처럼 인사하는 등 수술 이후 새로운 기억이 만들어지지 않았었다.

 뇌과학자들은 뇌 신경전달 과정과 기억 메카니즘을 완전히 파악하면 기억 능력을 촉진하는 약물도 곧 나올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손이 떨리는 등 행동장애가 일어나는 뇌질환인 파킨슨병도 현재는 특효약이 없다. 낙태 태아의 뇌세포에서 추출한 신경세포를 이식하면 효과가 좋지만 환자 한 명당 5~10명의 낙태아 뇌세포를 이식해야 한다. 컨퍼런스에서는 이를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뇌신경 줄기세포에 대한 연구 성과도 소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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