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갑자기 침묵에 빠진 엄마 그녀의 유언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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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호 22면

연극 ‘그을린 사랑’(김동현 연출)은 지난해 조용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영화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였다(연극이 먼저 발표되고 영화화되었지만 우리에게는 역순으로 소개된 셈이다). 영화는 때로 시적이고, 때로 다큐멘터리의 사실성에 육박하는 영상으로 나왈의 삶을 부조하고, 잔느와 시몽이 엄마 나왈의 삶을 하나하나 추적하는 드라마의 전개로 나왈의 고통과 저항의 무게를 더한다. 그러나 연극은 나왈의 삶으로 직진하지 않는 여러 겹의 이야기였다.

연극 ‘그을린 사랑’, 7월 1일까지 명동예술극장

물론 연극과 영화 모두 나왈의 죽음,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잔느와 시몽에게 남겨진 나왈의 유언에서 시작된다. 이제까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형을 찾아 편지를 전하라는 것. 어느 날 갑자기 말문을 닫고 침묵에 빠져들었던 엄마는 침묵에 봉인된 죽음 후에야 이렇게 두 자식에게 ‘말’을 남겼고, 잔느와 시몽은 혼란에 빠진다. 유언이 행해지느냐 아니냐는 잔느와 시몽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때 잔느와 시몽 이 둘의 혼란의 한가운데에서 나왈의 사랑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제 막 아이에서 벗어난 젊은 연인 나왈과 와합의 눈부신 사랑의 한가운데에서 잔느와 시몽의 혼란이 전개된다. 연극은 이렇게 두 겹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연극은 고통의 이야기이자 발견의 이야기이고,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맞물려 있다.

어디 그뿐이랴. 나왈과 함께 길을 나섰던 노래하는 여자 사우다의 울부짖는 분노는 나왈의 단 두 발의 총성과 맞물리고, 나왈은 감옥에서 치욕스러운 고문을 견디며 노래하는 여자가 된다. 나왈과 와합의 천진난만한 사랑의 징표였던 빨간코는 나왈의 잃어버린 아들 니하드의 텅 빈 삶과 겹쳐 있고, 나왈을 돌이킬 수 없는 침묵에 빠뜨린다.

하여 연극은 책임을 다하지 않은 자에게 비명은 없다는 나왈의 이야기이자 자신들의 공포의 기원을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잔느와 시몽의 이야기이고, 살인기계·고문기계로 알 수 없는 삶의 지루함을 견뎌내야 했던 니하드의 이야기다. 또 거슬러 올라가면 노래하는 여자 사우다의 이야기이고, 분노의 고리를 끊으라고 당부했던 나지라의 이야기다. 그리고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 더없이 크고 아름다운 흰나무 숲의 사랑 이야기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모티브로 여러 겹의 이야기를 정교하게 직조하는 희곡은 무대의 시공간에서 매우 분명하고 힘 있게 전개된다. 어린 소녀부터 노년까지 나왈의 삶이 전개되는 연극에서 나왈은 세 명의 배우가 나누어 연기하는데, 셋의 나왈은 때때로 무대 위에 함께 있다. 아이를 찾아나선 나왈과 엄마의 삶을 찾아나선 잔느는 서로 스치며 지나간다. 이러한 겹겹의 시공간은 분노와 저항, 저항과 치욕, 증오와 사랑이 서로서로 원인과 결과로 맞물려 부풀어가는 폭력의 현실을 그려낸다. 알 수 없는 과거는 그러나 지금 여기에 함께 있다. 비극은 먼 과거의 신화가 아니라 오늘의 이야기다.

‘그을린 사랑’은 말의 연극이자 침묵의 연극이다. 어떠한 충격적 사건도 무대 위에서 재현되지 않는다. 오직 말이 있다. 사랑을 노래하는 말, 분노를 토해내는 말, 고통에 울부짖는 말.

연극은 침묵, 죽음에서 시작되고 마지막 진실이 밝혀지면서 나왈은 침묵하고 잔느와 시몽은 그 진실에 도달해서야 엄마의 침묵을 듣는다. 나왈은 침묵 속에서 말한다. 잔느와 시몽 너희들의 이야기의 시작은 끊없이 반복되는 공포와 사랑이 아니라 할머니 나지라의 이름을 새기는 젊은 날의 자신이라고.

말은 흩어지지 않고 침묵은 망각이 아니다. 말은 멀리 오래오래 시간을 나른다. 흰 숲의 사랑과 노래하는 여자는 전설이 되어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된다. 말의 힘, 이야기의 힘, 그리고 진실의 힘에 대한 뜨거운 연극이다. 연극은 여러겹의 중첩된 시공간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잘 들려준다. 나왈과 사우다로 분한 배해선과 박성연은 영화의 스펙터클이 보여줄 수 없었던 분노를, 나지라와 노년의 나왈로 분한 이연규는 깊이 있는 캐릭터를 보여준다. 극의 초반 나왈과 와합의 사랑은 이 큰 이야기를 떠받치기에는 아쉬움이 크다.

레바논 내전
희곡을 쓴 와주디 무아와드는 레바논에서 어린 시절 이주해 현재는 캐나다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을린 사랑’은 레바논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레바논은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세력과 이슬람교 세력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계속돼 왔다.
1970년대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밀려들면서 그 갈등은 내전으로 격화된다. 75년부터 90년까지만 내전으로 인해 15만 명이 죽었다. 희곡에서는 구체적으로 레바논의 상황을 언급하지 않고 난민과 민병대의 갈등으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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