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의 대이동에 담긴 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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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동물이나 곤충에 빗대어 이야기하면 적지 않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엄청난 깨달음이 필요한 진리를 담은 게 아니라도 말입니다. 예로부터 우화라는 문학의 장르는 그래서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이야기되는 것 아닌가요. 서양의 '이솝 우화'가 그렇고, 우리의 '호질'과 같은 옛 우화들이 모두 그런 종류가 되겠지요.

사람 살이가 점점 어렵고 힘들어지니, 사람들은 세상의 흐름을 따라 어렵고 힘든 쪽에서 슬기의 알갱이를 찾으려 하지만 어쩌면 언제나 그건 짐승이나 곤충의 살림살이처럼 아주 단순한 곳에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성 본능은 고장났다'는 식으로 사람의 본디 속성을 상당 부분 잃고 살지 않느냐는 어느 심리학자의 주장에 눈길이 가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일 겁니다.

어쨌거나 우화 속의 진실은 그 이야기의 흐름을 빼놓고 이야기하면 지나치게 단순하거나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 정도에나 나올 법한 뻔한 이야기들이어서, 따분하고 재미 없습니다. 그러나 우화 속의 생물이 자신의 살림살이를 지켜나가는 이야기 가운데에 그 진실을 삽입했을 때의 느낌은 전혀 다릅니다.

여전히 우리는 짐승보다는 우월한 인간이어야 하니까요. 인간에게 들이댔을 때는 '아무려면 내가 그 정도의 이야기도 모를까봐'하고 넘어가는 이야기지만 그걸 짐승의 삶에 빗대어 이야기할 때, '짐승이니까'라면서 받아들이고 느낌을 받게 되는 거지요.

기러기 떼의 겨울 대이동을 하는 모습은 참 장관입니다. 그들의 놀라운 규칙과 질서 정연함은 보는 사람들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안에 어쩌면 사람 살이에서도 캐내지 못하는 슬기의 알갱이가 있지 않을까를 생각하면서 쓰인 책이 바로 '아름다운 비행'(루이스 타타글리아 지음, 권경희 옮김, 중앙M&B 펴냄) 입니다.

이 책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진리라는 것도 어쩌면 이미 초등학교 때 배웠던, 그러나 모두가 잊고 지내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일 겁니다.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결코 뼈대만 이야기해서는 아무런 감동이 없을 법한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러나 기러기의 겨울 대이동을 소재로 풀어간 이 이야기에는 감동이 있습니다.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찮은 기러기의 삶을 이야기한 것이니까, 기러기에 비해 우월한 사람은 그들에게 감동하게 되는 겁니다.

이 책은 새로 태어난 어린 기러기들이 겨울 대이동을 위해 비행훈련을 배우는 과정과 실제 겨울 대이동을 하는 이야기입니다. 나이 든 기러기가 어린 기러기들에게 겨울 대이동의 원리를 가르치는 것이지요. 기러기의 가장 중요한 삶을 가르친다는 겁니다.

나이 든 기러기가 비행 연습을 해야 하는 어린 기러기에게 자신의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어요. 내가 낙오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무리 전체의 내 친구들이 나를 구하려고 마음을 모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요. 그때 나는 축제에서 버기던 내 모습이 사실은 가장 추한 모습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답니다."(이 책 51쪽에서)라고 말합니다.

아주 단순한 이야기이지요. 자기 혼자 잘났다고 뻐기던 지난 날을 뉘우치고, 공동체의 삶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그러나 누구도 그 단순한 진리를 실천하지 못하는 이야기 아니었던가요? 그러나 어린 기러기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서로 호흡을 맞추도록 노력하면 자신들의 힘보다 더 센 어떤 힘이 각자의 날개에 붙게 될 거예요. 두 사람의 힘보다 더 큰 힘을 만들어내는 훈련이죠. 이건 아주 중요하답니다. 지금은 단 둘의 힘이지만 무리 전체가 모이면 엄청난 힘이 되는 거죠."(이 책 69쪽에서)

역시 지겹도록 들어왔던 공동선 이야기입니다. 그저 본능에 따라 행동하며 살아가는 짐승들이 그 작은 진리를 위해 애써 훈련하고, 공동체에 귀속되기 위해 자신을 깨뜨려 가는 모습은 적잖은 느낌을 던져 옵니다.

새로 태어난 기러기 고머, 빌, 프리티 들은 처음에 공동체 속에 귀속돼야만 하는 자신의 운명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겨울 대이동과 편대 비행을 거부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들은 기러기 집단에서 이야기하는 '큰 마음'과 '위대한 날개'를 차츰 깨닫게 됩니다. 물론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 단련에 대한 회피, 정신적 갈등 따위는 하나의 기러기가 공동체 속에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참다운 자기의 모습을 찾으려 애쓴 주인공 고머는 마침내 대자연의 섭리에 따라 겨울 대이동에 참여하고, 무리를 위해 과감하게 희생을 하게까지 됩니다. 이는 곧 고머 자신의 위대한 발견이자, 공동체의 뜻인 '큰 마음'에 바짝 다가선 결과이지요.

한 권의 책을 보며 얼마나 많은 것을 얻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볼 수 있는 계기를 갖는 것, 그래서 그 책을 읽은 사람과 안 읽은 사람 사이에 차이를 빚어낼 수 있는 것. 그것 정도면 충분히 훌륭한 독서 체험 아닐까요?

고규홍 Books 편집장 (gohkh@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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