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28년 만의 이사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73호 04면

제가 입사했을 때는 납 활자 시절이었습니다. 편집국에서 넘어온 원고를 문선부장이 죽죽 찢어 나눠주면 담당자들은 좌대 사이를 돌아다니며 재빨리 활자를 골라냅니다. 기사 내용을 중얼거리며 글자를 찾는 모습이 노래를 하는 것 같기도, 염불을 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성냥개비보다 조금 큰 본문 활자는 한 줄에 13자씩 들어갑니다(당시 신문 1단 규격). 뚜껑 없는 나무통에 채자한 덩어리를 순서대로 모은 뒤 먹을 묻히고 롤러로 밀어낸 초고를 일본식으로 ‘게라’라고 불렀죠.

이 게라를 보고 제목을 뽑고 오·탈자를 잡아내는 사이 정판부에서는 바퀴 달린 쇠 탁자 위에서 편집자의 레이아웃(이것도 ‘와리스케’라고 불렀습니다)을 보며 판을 짜기 시작합니다. 마감 시간이 다가오면 긴장감은 고조됩니다. 갑자기 급한 기사라도 들어오게 되면 말 그대로 호떡집에 불이 납니다. 편집자 지휘 아래 모두 달라붙어 머리를 조아리고 쉴 새 없이 핀셋을 움직입니다. 축축이 젖은 시험지에 OK 사인이 나면 쇠 탁자 위 활자판을 꽉 조이고 반들반들한 종이에 최종 지면을 찍어냅니다. 이 종이를 필름으로 찍어 윤전기는 신문을 토해냈지요. 난리법석이 사라진 정판부의 적막은 정갈했습니다.

편집국이 이사간다는 얘기에 문득 옛 생각이 났습니다. 납 활자 제작 시스템도, 일본식 용어도 다 옛날 얘기입니다. 그 추억의 흔적을 뒤로 하고 28년 만에 고향집으로 돌아갑니다. 근사하게 새로 꾸며진 공간에서는 또 어떤 추억이 만들어질까요.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