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풍 골목길 거닐다 우연히 들른 카브에서 와인 골라 마시는 맛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72호 19면

1 샤토네프 뒤 파프 마을 정상의 교황의 성에서 바라본 마을 풍경 2 샤토네프 뒤 파프 마을 입구의 라 바스티드 블루(La Bastide Bleue) 호텔 3 프로방스의 포도밭 풍경 4 교황의 성에서 피크닉하는 사람들

프랑스 남쪽의 프로방스는 많은 사람에게 어떤 ‘이미지’다. 그것은 느리게 가는 시간 속을 걷는 느긋한 삶일 수도 있고, 강렬한 햇볕 아래 생명력으로 이글거리는 대지일 수도 있다. 아니 하얀 테이블보가 깔린 식탁 위에 푸짐하게 차려진 맛있는 음식과 근사한 와인이라면 어떨까.

프랑스 프로방스의 와인마을 ‘샤토네프 뒤 파프’

교황 모자와 천국문 열쇠 두 개 새긴 와인
프랑스 남부 론 지역의 샤토네프 뒤 파프(Chateaunef du Pape)는 대표적인 와인 마을이다. ‘교황의 새로운 성’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교황의 역사와 와인의 역사가 함께 공존하는 곳이다. 파리 리옹 역에서 마르세유 방향의 고속열차를 타면 부르고뉴와 보졸레 지역을 지나 론 강가의 마을에 도착할 수 있다. 보졸레 아래 지역에 있는 론 지역은 북부와 남부로 나뉘는데 그중 남부 론을 대표하는 와인 마을이 바로 샤토네프 뒤 파프다.이 마을에는 기차가 따로 다니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마을인 오랑주(Orange)에서 하차해 택시로 20분 정도 거리에 있다. 오랑주 마을을 벗어나면 바로 방대한 포도밭이 나오고 그 사이를 가로질러 작은 도로가 나있다. 필자는 20년 전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오랑주에서 자전거로 이 마을까지 산책을 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데, 가을날 자전거를 타며 보았던 굵은 자갈 포도밭들의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가는 도중 곳곳에 와인 양조장들이 있어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었는데 지금도 이런 모습에는 변함이 없다. 포도밭의 나무들은 좀 더 나이를 먹었지만 그들을 지탱하고 있는 굵은 자갈들은 여전했다.

5 포도밭에서 바라본 교황의 성 6 샤또네프 뒤 파프 마을 풍경

이 마을을 유명하게 한 포도나무들은 역사적으로는 골족에 의해 알려졌다. 여기에 로마인들은 거대한 포도밭을 조성했다. 기록에 의하면 13세기에 10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당시 300㏊ 이상의 포도밭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초창기 대부분의 와인은 부르고뉴 지역으로 팔려나갔다.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와인이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로마 교황청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아비뇽에 머물러 있던 교황들에 의해서다. 1308년 클레멘스 5세는 그가 죽기 몇 해 전 론의 포도나무를 이곳에 심었다. 그 뒤를 이은 교황 요한(John) 22세는 이곳의 와인을 공식적으로 세례에 사용하며 ‘교황의 와인’으로 명했다. 교황으로부터 인정받은 와인은 자연스럽게 명성을 얻었다. 나중에 ‘샤토네프 뒤 파프’ 와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래서 이곳에서 생산되는 와인 병에는 교황의 모자와 교황청과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두 개의 열쇠가 새겨져 있다.

7 도멘 반느헤의 오너 장 클로드 비달 8 마을 풍경

한때 무기고 ‘교황의 성’ 반쪽만 남은 사연
교황 요한 22세는 여름 별장 장소로 아비뇽에서 가까운 이 마을의 가장 높은 언덕에 성을 짓게 했다. 성의 흔적은 지금도 이 마을의 심벌처럼 언덕 정상에 서 있다. 그런데 거의 허물어진 형태로 한쪽 벽면만 남아 있다. 여기엔 사연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이 성에 폭탄을 저장했고, 전세가 어려워지자 이곳을 지키던 두 독일 장교에게 폭탄을 폭파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 장교는 명령에 따라 성 한쪽을 완전히 파괴시켰지만 다른 장교는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생각해 폭파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한쪽 벽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 당시의 웅장했던 모습을 상상하게 도와주고 있다. 전쟁 속에서도 한 인간의 문화사랑이 최악의 비극을 막은 아름다운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이제 사람들은 자동차를 몰고 이 언덕을 찾아와 허물어진 성의 모습과 주변의 파노라마를 가족들 또는 연인들과 즐기고 있다. 전쟁은 옛날이었고, 지금은 방문객들의 좋은 전망대로 남았다.

9 와이너리를 안내하는 이정표들

오랑주 역에 오후 3시 30분쯤 도착했다. 파리에서 오전 11시 30분쯤 출발해 중간에 기차를 한 번 갈아탔다. 택시로 마을에 도착하니 오후 4시 정도. 마침 일요일이라 마을에 사람이 많이 보이지는 않았다. 마을 입구 호텔에 묵기로 했는데 투숙객이 필자 혼자였다.
마을 산책에 나섰다. 마을이 워낙 작기 때문에 한 시간 정도 걸으면 제자리로 올 수 있다. 이 지역에서 가장 무섭다는(?) 강력한 미스트랄 바람이 온 마을을 뒤흔들고 있었다. 오래된 골목 언덕길로 접어들자 바람은 더욱 거세졌고 성의 허물어진 벽이 있는 정상에 오르자 몸이 날아가는 듯했다. 주변 포도밭을 보니 풀들은 거의 90도 가까이 휘고 있었다. 다행히 포도나무들은 둥글고 굵은 자갈들이 보호하고 있어 막 자라고 있는 새순들만 힘겹게 강한 바람에 저항하고 있었다.

풀을 90도로 눕히는 공포의 미스트랄 바람
카메라로 포도밭 모습을 찍기 위해 웅크렸지만 거센 바람에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하늘은 정말 파랗고 맑았는데 이 바람들은 어느 곳에서 오는 것인지 야속할 정도였다. 언덕을 내려오자 심했던 바람도 오래된 벽들에 막혀 비로소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래된 마을의 골목길을 산책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세월의 흔적을 온몸으로 느끼며 한발 움직일 때마다 새로운 정감이 느껴지곤 한다. 이곳에서는 산책하다 열려 있는 카브(와인 저장고)를 방문하면 누구나 시음할 수 있다. 이 마을의 상당수 와인이 몇 해 전부터 미국의 세계적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에게 90점 이상의 좋은 점수를 받으면서 가격이 너무 올랐다는 것이 문제이긴 했지만, 잘 고르면 좋은 와인을 싼 가격에 마실 수 있었다. 와인 시판 가격은 20유로부터 200유로까지 다양했다. 술 익는 마을에서 우연히 들른 카브에서 마시는 근사한 와인, 프로방스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다.

몇 개 가족 와이너리를 방문해 보기로 했다. 우선 세 명의 형제가 와인 만드는 일에서 판매하는 일까지 서로 분담하고 있는 도멘 레 3 셀리에(Domaine les 3 Cellier)다. 셀리에 나탈리가 포도밭을 보여준 뒤 와인 양조장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일곱가지 정도를 시음할 수 있었다. 특히 2009년 샤토네프 뒤 파프가 인상적이었다. 잘 익은 포도의 특징을 보여주었는데 모두 8개 품종을 섞어 만들고 있었다. 이 와인은 15년 이상 숙성이 가능하단다.

두 번째 와이너리는 포도밭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갖고 있는 도멘 반레(Domaine Banneret). 오너는 은퇴한 건축 디자이너로 딸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포도밭이 매우 자연스러웠고 오래된 포도나무가 있었다. 셀러에서 여러 빈티지를 시음했는데 90년산은 정말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이 와인들은 숙성력이 있었다. 다음에 방문한 와이너리는 마을 입구에 있는 도멘 마티유(Domaine Mathieu)다. 프로방스 사투리를 강하게 사용하는 40대 중반의 오너가 나왔다. 가업을 물려받아 동생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는데 자신이 만든 와인을 모두 따라주고 마지막에 올드 빈티지로 1985년과 1987년을 내왔다. 두 빈티지를 시음하면서 특히 85년산에 매료됐다. 오렌지 빛깔을 띠고 산미가 감칠맛 있게 살아 있으며 타닌이 우아한 달콤함으로 변하고 있는 맛은 환상적이었다. 어떻게 이런 맛으로 와인이 숙성되는 것일까?
시음을 마친 필자는 남은 85년산 와인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저녁식사에 이 와인을 가져갈 생각이었다. 이곳의 전통 요리와 함께하면 정말 프로방스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할 것 같았다. 저 멀리 프로방스의 맑은 파란색으로 칠을 한 호텔의 나무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