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디지털시대에 편지를 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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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신달자
시인

누가 마음을 주고받는다고 했을까. 만약 마음을 주고받는다면 그것은 휴대전화의 문자도 메일도 사진의 교환도 아닌, 자신의 손으로 쓰고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넣고 그래서 집배원이 주소를 찾아 벨을 누르고 주인이 나오고 서로 웃으며 전달하고 받고 봉투를 가위로 자르고 내용을 꺼내 읽는, 읽고 다시 읽는 그래서 마음이 차분해지며 모든 상황을 새롭게 정리해 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마음을 나누는 일이 아닐까 싶다.

 우정사업본부에서는 매년 편지쓰기 대회를 한다. 지금까지 아마도 수억 통의 편지가 씌어졌을 것이고 읽었을 것이다. 왜 최첨단 기계문명의 꽃이 만발하는 이런 시대에 종이에 자신의 글로 쓰는 편지쓰기 대회를 하는 것인가. 우정사업본부가 마음먹고 하는 이 행사는 우체통이 비어서도 집배원이 일거리가 없어서도 아니다. 이렇게 혼돈과 정체가 불투명한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서로 마음속에서만 꾹꾹 누르며 갈등 속에 사는 모든 이에게 과감히 편지를 쓰는 마음운동을 펼치자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손이 움직이면 마음이 움직이는 것, 마음이 움직이면 손이 움직이는 것, 이것이 서로 갈등을 해소하고 푸는 마음운동, 곧 소통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화해고 이것이 순응이며 이것이 인간적 도리며 새로운 삶의 정기를 주고받는 것이라면, 이것이 사랑하는 방법이라면 굳이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소통의 부재 시대 아닌가. 편지를 쓰는 일을 내성적인 사람들의 행동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얼굴을 보면서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시간도 절약되고 손을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내성적인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창의력을 갖고 있으며 그 놀라운 변화를 직접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 우리가 편지쓰기를 시간 절약의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그 시간을 절약해 도무지 우리가 그 시간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묻고 싶다. 문자를 쓰는 일은 자기정화를 하는 데 필수적 요건이라는 것, 이것이 편지가 갖는 최고의 가치일 것이다. 그리고 관계 회복에도 특효약이 아닐까.

 편지는 말로는 다 못 하는 깊은 대화이므로 마음의 끝까지 따라갈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며 읽는 사람도 그 마음의 끝을 따라가므로 벼랑에서도 화해의 감동을 끌어올 수 있다.

 그래서 아득한 마음의 지평선도 허물 수 있는 기적 또한 가능한 일이다. 대개는 가까운 사람끼리 갈등이 심하다 마음을 다친다. 서로 상처를 준다. 골이 깊어진다. 가장 가까워야 할 혈육 간에도 남보다 훨씬 그늘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쌓여 있다고 하자. 이것이 휴대전화 문자로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우리는 감정이 격렬해질수록 감정을 다스리는 쪽으로 자기를 데리고 가야 하는 자기처방이 필요하다. 울컥 말로 하는 것보다 시간을 끌면서 종이를 꺼내고 펜을 쥐고 생각하다 보면 감정의 원인이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편지는 대게 “미안하다”로 시작하고 “너의 축복을 빈다”고 끝나는 것이다. 편지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어떤 마음의 앙금도 편지를 쓰고 받고 서로 시간을 두고 생각하면서 앙금은 풀리고 서로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에 이르는 것이다. 절규보다 외침보다 편지에 마음을 담으면 그것은 화해가 되고 자기존재가 용서하는 사람이 되는 길목에서 미소를 머금게 되고 오히려 상대방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편지는 우리를 선하게 하고 자신도 느끼지 못한 사랑의 존재를 만나게 하는 것이다.

 이미 꽃은 시들고 잎들의 세상이다. 나이가 드니 잎들의 깊은 의미를 알겠다. 저 신록은 녹음이 되고 단풍이 되고 낙엽이 되고 그 낙엽이 떨어져 나무의 이불이 되고 다음엔 썩어 나무의 영양제가 될 것이다. 모두 줄 수 있는 저 거룩한 잎을 수도자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풀지 못할 갈등이 있겠는가. 사회적인 무드로 편지쓰기는 지금도 모든 이에게 필요한 소통의 처방이 아닐까 한다.

신달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