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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회 50회’에 이기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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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김현기
도쿄 총국장

일본의 다케시타 와타루(竹下亘·65) 자민당 의원, 그는 한국통이다. 1990년부터 10년간 일·한 의원연맹 회장을 지낸 다케시타 노보루(2000년 작고) 전 총리의 동생이다. 형의 비서를 하며 보고 배운 게 한·일 관계다. 2009년 2월 재무성 부대신으로 있을 때는 ‘원·엔 스와프(교환)’의 한도를 30억 달러에서 300억 달러로 10배 올려놨다. 열흘 전 그와 식사를 하며 양국의 국민성 차이를 화제 삼다 무릎을 쳤다.

 “근데, 2009년 8월 자민당이 민주당에 정권을 넘겨준 뒤 ‘반성회’를 몇 차례 연지 아세요? 무려 50번이에요. 30회까지는 비우호적인 언론 탓만 했죠. 그 다음부터 진정한 자체 반성을 하게 되더군요. 물론 반성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반성회 50회’에 담긴 일본 사회의 키워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징그러울 정도의 형식주의와 철저함, 또 하나는 결코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본 시장은 외국 기업에 난공불락의 성이다. 영국의 최대 은행인 HSBC가 최근 4년 만에 일본 철수를 결정한 것이나 세계적 수퍼마켓 체인인 테스코가 8년 만에 두 손 들고 일본을 떠난 것도 다 위의 두 가지 키워드를 극복하지 못해서다. 한국 기업 또한 예외는 아니다.

 삼성전자는 ‘일제 고집병’에 걸린 일본 소비자의 심리에 질려 2007년 소비자 가전시장에서 철수했다. 현대차는 전국 50곳에 대리점을 설치하고도 한 달에 13대밖에 못 팔다 2009년 승용차 판매를 포기했다.

 그래서 더욱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기업이 있다. 1977년 일본에 진출한 진로다.

 요즘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냄새 난다며 김치조차 몰래 숨어 먹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90년대까지 그랬다. 그런 시절 도쿄 한복판 롯폰기 사거리에 우뚝 서 있던 진로 전광판만 보면 마음이 푸근해지곤 했다. 2005년 한국 진로그룹이 하이트그룹에 넘어가자 진로재팬이 아사히맥주·기린맥주에 팔려 넘어갈 위기도 있었다. 그걸 버티더니 막걸리로 대박을 터뜨렸다. 매년 6% 이상 축소되는 일본 주류시장에서 매년 30% 이상 매출이 꾸준히 늘고 있다. 이제 아사히·기린에 진로는 매물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이다.

 일본 회사가 반성회 50회 하는 동안 100회 넘게 반성한 결실이다. 서두르지 않고 길고 깊게 바닥을 다져 일본 소비자의 마음을 훔친 성과인 것이다.

 한류 바람을 타고 많은 한국 기업이 일본으로 속속 몰려오고 있다. 모두가 성공을 꿈꾼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류의 인기를 업고 한몫 챙기면 대충 떠나려는 기업이 많아 보인다. 유행만 좇을 뿐 장기전을 각오하고 신뢰 쌓기에 나서는 기업은 드물다.

 퇴근길 긴자 사거리의 대형 모니터에 반복해 흘러나오는 진로의 광고 동영상은 즐겁다. 그걸 흥겹게 지켜보는 일본인들을 바라보는 건 더욱 즐겁다. ‘제2의 진로’가 등장하길 간절히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