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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함에서 벗어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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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이영직
변호사

지방노동위원회의 공익위원으로 근로자들의 부당해고 구제 신청 사건의 판정을 담당한 경험이 있다. 처음 심판을 담당했을 때는 사건을 주도면밀하게 검토한 다음 그래도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근로자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한 결론을 이끌어 내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해고가 정당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때는 참으로 마음이 아팠다. 어설픈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전 생계가 달려 있는 직장에서 강제적으로 배제되는 경우 과연 그 근로자는 가족들과 함께 제대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내가 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까지 치명적일 수도 있는 판단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괴로움에 휩싸이곤 했다. 그리하여 해고가 정당하다고 결론이 나는 경우 밤에 잠이 오지 않고, 꿈에 그 근로자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피하기 위해 함께 판정을 한 공익위원들과 회의가 끝난 후 통음을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사람이란, 아니 내가 참으로 간사한지라 1년, 2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서서히 해고가 정당하다는 결론을 내고 싶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근로자는 자신에 대한 해고가 부당하다는 점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고 그야말로 ‘주먹구구로’ 주장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 회사는 공인노무사나 변호사를 통해 근로자의 비위 행위를 깔끔하고 논리적으로 제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근로자도 변호사나 공인노무사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도 하나 아무래도 ‘객관적인’ 자료는 회사에 더욱 많기 때문에 회사의 주장이 더 정당하게 보이게 마련이었다. 처음에는 회사가 제시하는 ‘객관적인’ 자료를 넘어 ‘진실’을 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귀찮아지는 것이었다. 근로자가 터무니없게 떼를 쓰는 것처럼 보이고 “회사가 아무려면 아무런 잘못이 없는 근로자를 해고하기야 하겠는가” 하는 등의 생각이 머리를 맴도는 것이었다.

 뒤늦게라도 “내가 뭘 하는 것이지” 하고 스스로 자각하지 않았다면 매너리즘에 빠져 근로자의 구제신청을 ‘아무 생각 없이’ 기각하는 참으로 무책임한 인간이 될 뻔했다. 항상 경계하고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으면 진부한 일상으로 빠져든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보화 시대니 후기 산업사회니 하여 복잡다단한 사회에서, 개인으로서는 그 실상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온갖 그물망으로 엮여 있는 사회에서 눈앞에 보이는 제도나 구조, 혹은 일상에 스스로를 맡김으로써 편안함을 느끼고 싶은 것은 나약한 우리들이 흔히 경험하는 터다. 그러나 자신을 잠시나마 방치하고 “좋은 게 좋은 것이지” 하다가 보면 엉뚱한 생각을 하고, 엉뚱한 위치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개그맨의 말처럼 “나 좀 말려줘” 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게 되는 것이다.

 요즘 고전이나 인문학에 대한 열기가 뜨거운 것을 느낄 수 있다. 주위에서도 몇몇이 모여 인문학에 관한 책을 읽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것을 보곤 한다. 고전이나 인문학이라는 것이 우리와 뚝 떨어져 있는 공자·맹자의 이야기를 모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자신이 참으로 게으른 사람이며, 그렇다고 하여 나 자신을 함부로 그 어떤 외부에 맡기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용기와 혜안을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즉 살면서 순간순간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내공’을 고전이나 인문학을 공부함으로써 기르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공부를 하고 내공을 기르려면 피곤한 점이 참으로 많을 것이다. 끊임없이 깨어 있어야 하고, 잠시도 쉬지 않고 나 자신을 경계해야 하고, 변화하는 세상을 바로 보는 노력을 해야 하고.

 안 그래도 먹고살기 힘든 세상에, 그리하여 ‘피로사회’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쉬지 않고 자기를 들들 볶으라는 주문은 가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지만 사람이란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생명체라고 하지 않는가. 이러한 지위를 차지하려면 그 정도의 세금은 내야 하지 않을까.

이영직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