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필요 … 말로만 진보, 행동은 그렇지 못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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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학자 최장집(69·사진) 고려대 명예교수는 최근 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해 “진보가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14일 전화 인터뷰에서 진보당 당권파가 보여준 일련의 행태를 “시대착오적”이라며 “진보세력이 타도하려 했던 군부독재 권력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

 -이번 사태를 어떻게 보나.

 “일부 진보정치세력의 문제는 심각하다. 이번 당권파의 행태는 시대착오적이다. 진보세력이 정당성을 잃었다. 민주주의 가치와 원리에 부응하지 못했다.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 바람에 진보세력이 정당성을 잃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보나.

 “진보세력들이 민족과 통일 같은 거대한 이념·가치에 매몰돼 왔다. 그러다 보니 타협과 공존 같은 공동체적 가치, 공정한 선거와 같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가치를 무시했다. 진보세력이 민주화 운동을 통해 민주화를 이뤄 놓고서는 그 후 민주주의 규범과 가치에 맞게 스스로의 행태를 바로잡는 데 실패한 셈이다. 이런 식이면 그들이 타도했던 군부독재와 뭐가 다른가. 방식은 다르지만 민주주의를 무시한다는 점에선 다를 바 없다.”

 -진보정치란 어떠해야 하나.

 “진보정치는 필요하다. 진보를 정의하기 나름이지만, 기본적으로 진보의 역할이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늘 성장과 분배의 문제, 빈부격차와 소외의 문제는 있기 마련이다. 이런 사회구조 속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대변하고, 이들의 권익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하는 것이 진보다. 우리의 진보세력이 과연 이런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 의문이다. 말로만 진보였지, 행동은 그렇지 못했다. 진보가 진보정치에 치명적 타격을 가했다. 이번 사태는 진보가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당권파, 혹은 주사파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사회는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민족이나 통일은 중요한 문제다. 그러기에 이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가진 정치세력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어느 나라에나 극소수의 지지를 받는 정치집단은 존재한다. 그런데 어떤 생각을 하든 민주주의 절차는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

 -진보정치를 위한 조언을 하자면.

 “진보정치세력이 벼랑 끝에 섰다. 민주주의에 대한 굉장히 근본적인 생각과 태도의 변화가 없을 경우 진보는 도덕적 정당성을 회복하기 힘들 것이다. 민족이나 통일의 문제가 민주주의 가치를 초월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이번 사태는 그런 생각의 필연적 결과다. 진보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이 돼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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