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에 찍어낸 상처받은 땅,인간에게 버림받은 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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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호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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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사진작가 12명이 지난해 이스라엘에 모였다. 작가 인생 30년을 ‘유대인의 삶의 기록’에 바쳐온 다큐멘터리 사진계의 거목 프레데릭 브레너가 이끄는 이스라엘 : 진행 중인 초상화( Israel: Portrait of a Work in Progress)’ 프로젝트를 위해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의로운 사람 재단(Righteous Persons Foundation)’을 비롯해 브레너가 사진에 담아온 유대인들로부터 모은 350만 달러의 기금으로 성사된 프로젝트다. 컬러 사진의 거장 스테판 쇼어, 라이트 박스를 이용한 네오 픽토리얼 사진의 선두주자 제프 월, 도시와 가족 초상으로 독일 현대사진을 대표하는 토마스 스투루스 등이 지난해 6개월간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통해 촬영을 마치고 2014년 봄 스위스를 시작으로 전 세계 미술관 순회 전시를 위한 결과물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다.

세계적 사진작가 11인과 ‘이스라엘 프로젝트’ 이정진씨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세계적 거장들이 하나의 테마로 공동작업을 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 그 12명의 거장 가운데 한국 작가 이정진(50)이 포함된 것은 한국 사진계의 일대 사건이라 할 만하다. 현대사진의 대가 로버트 프랭크의 조수로 입문해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활발히 활동 중인 그는 수제 한지 작업으로 오리지널리티와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The American Desert’ ‘On Road’ ‘Wind’ 시리즈 등 인간에 의해 버려지고 상처받은 땅을 오랫동안 조망해 왔다. 이 프로젝트의 유일한 동양인으로 참여하게 된 이유다.

2 이스라엘 웨스트 뱅크에서 촬영 중인 작가

-세계적인 작가들의 공동 프로젝트에 유일한 동양인으로 참여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번 프로젝트는 어떤 의미였나.
“30년 가까이 늘 내 작업이 마무리되면 발표하는 형식이었는데 처음으로 주어진 과제를 받아 작업하게 됐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쟁쟁한 작가들이 같은 장소에서 작업한다는 것도 새로운 도전이자 기회였다.”

-세계적인 사진가들이 그룹으로 작업하는 일이 흔치 않은데, 이 프로젝트의 무엇이 그들을 동참하게 했나.
“이스라엘은 정치적·종교적으로 핫한 나라여서 다큐멘터리 쪽 작가들에게나, 나처럼 순수미술 쪽에나 다양한 주제를 끌어내기에 충분한 보물창고다. 다른 작가들도 그런 점에서 응했을 거다. 또 이스라엘 정부 차원이 아니라 사진작가 브레너 개인이 기획한 프로젝트라 그 차원에서 수락했다. 정부가 주도했다면 많이 참여하지 않았을 거다. 그래도 주최 측은 어떤 의도가 있었겠지만, 작가조차 원래 의도와 현지 작업이 달라진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관계에 있어서도 처음 의도와 진행과정이 많이 변한 작가도 있다. 이스라엘 프로젝트지만 결과적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테리토리에 대한 이야기로 결과가 지어질 것 같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을 같은 비중으로 놓고 작업한 작가가 많고, 나 역시 정서적으로 그쪽으로 마음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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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명의 작가와 같은 주제를 놓고 작업한다는 것은 어떤 경험이었나.
“이스라엘 땅을 공통 기반으로 했을 뿐 주제는 다 다르다. 12명 중 3~4명이 유대인이고, 유대인이라도 친이스라엘 마인드이거나 아니거나 시각이 각자 다르다. 모두 정치적인 것을 예민하게 느끼면서도 금기사항처럼 작업 과정 중에 많이 오픈하지 않고 개별 작업을 했다. 작가들 사이에서도, 주최 측에서도 긴장이 있었다. 대상을 갖고 작업하는 사진예술은 그 리얼리티를 무시할 수 없기에 작은 나라, 제한된 공간에서 12명이 부대끼는 것이 서로 부담이면서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전체 그림을 다 볼 수 없었지만 기획보다 결과가 재밌을 거란 기대감이 있다. 다른 시각, 생각이 12명 숫자만큼 다양하게 나올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바라본 ‘유대인의 삶’이란 어떤 것이었고, 어떤 이야기를 사진에 담고자 했는지.
“팔레스타인 쪽에 마음이 갔다. 일방적으로 당하는 입장이어서일 수도 있고, 그들이 살고 있는 쪽의 풍경, 유적지, 고대도시들, 기본적으로 땅과 자연에 대한 느낌들이 친근해서였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작업이 이스라엘 땅보다 팔레스타인 사막 쪽으로 갔지만, 직접적인 것은 절제를 하고 이스라엘을 보여주기보다 나 자신을 오버랩했다. 나만의 정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인들의 상태이기도 할 거다. 보이지 않지만 그림자 같은 정서, 사람 마음에 대한 이야기다.”

-20년 동안 한지 작업을 고집하는 의미가 있나.
“그동안 작업해 온 소재가 풍경 쪽이고 내면적인 것들인데, 인화지 표면에 떠 있는 것이 아닌 한지에서 이미지가 깊이 배어 나오는 맛들이 좋아서 오랫동안 해왔다. 감광유제를 발라 인화지로 만드는 작업을 거치면 프린트를 했을 때 앞뒷면 전체에 톤이 스며든다. 은근하면서 깊이 있는 그 느낌이 좋다. 하지만 ‘한지 작가’라는 말을 썩 좋아하진 않는다. 동양적이라는 작가 이미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작품에 흐르는 정신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처음 디지털작업을 시도했다. 한지와 디지털의 균형은 어떻게 유지했나.
“내 사진이 한국적이거나 동양적이라 읽혀진다면 한지 프린트라서가 아니라 풍경 사진을 읽어내는 정서가 한국적·동양적인 느낌을 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을 찍었느냐보다 보이지 않는 여백 처리같은 것. 그런 면에서 한지건 디지털이건 나로선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이번 프로젝트도 한지가 갖고 있는 맛을 유지하면서 기계를 정교하게 컨트롤하는 방법으로 디지털작업을 했지만 디지털이냐 아날로그냐는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중요치 않다. 그 안에서 뭘 읽어내는지, 매체를 넘어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으면 좋겠다.”

-세계적인 작가들을 모아 이스라엘의 현실을 조명하게 한 시도가 전 지구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효과적일 듯싶다. 한국을 무대로 비슷한 프로젝트를 해 볼 생각은 없나.
“브레너가 나에게도 한국에서 비슷한 프로젝트를 할 때 불러달라고 농담은 하더라. 이번에 참여하면서 누군가 한국의 이슈를 갖고 이런 프로젝트를 만든다면 충분히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주최자가 스폰서를 모으고 작가로 참여하는 1인3역을 감당하는 그의 에너지는 감히 흉내내기 힘들다. 다만 사진 역사에서 전례 없는 프로젝트고 전 세계 미술가·사진가들이 이 프로젝트가 어떤 파급효과를 가져올지 상당한 관심이 있다. 전에 없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고, 이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공동 프로젝트가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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