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졸 실력에 놀란 삼성, 600명 뽑으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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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찬 부사장

한 대기업 임원은 이렇게 말한다. “잘나가는 국책기관은 100점짜리 수재를 80점짜리로 만들고, 삼성에선 80점짜리 평범한 사람이 들어와서 90점 넘는 인재로 성장한다.” 삼성의 저력을 잘 나타내주는 말이다. 실제로 삼성에서는 실력만 갖추면 학벌이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삼성전자 윤부근 사장(소비자가전 담당)은 “나는 고등학교를 5년이나 다닌 사람이다. 쫄지 말고 달려라”고 설파한다. 신종균 사장(무선사업 담당)은 광운대를 졸업하기 전엔 전문대를 다녔다.

 그런 삼성이 또 한번의 학력 파괴를 보여줬다. 9일 고졸 공채 최종 합격자 발표에서다. 당초 삼성은 600명을 뽑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700명으로 늘렸다. 이에 따라 올해 고졸 채용 전체 규모도 9000명에서 100명 더 늘어나게 됐다. 삼성전자 원기찬(52) 인사팀장(부사장)은 “선발자 중 20%는 대졸 출신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의 실력을 갖춰 당장 실전에 투입해도 될 정도로 뛰어났다”며 “이번 공채를 통해 응시자들의 우수한 잠재 역량과 열정에 놀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놀라운 말을 덧붙였다. “학력을 우선하는 분위기가 바뀌려면 5~10년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이번 공채를 진행하면서 3~5년이면 사회의 물줄기가 바뀔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됐다.”

 어떤 고졸자들이 몰렸기에 원 팀장을 흥분시켰을까. 이번 공채에서 삼성전자 입사가 결정된 김모씨는 어머니의 오랜 암 투병 때문에 가세가 기울면서 공업고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병상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학업을 이어간 그는 학교 대표로 일본 연수 경험까지 쌓았다. 농촌에서 조경 관련 일을 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고교 조경과에 진학한 이모씨도 학교에서 상위 6%의 학업 성적을 거뒀다. 그는 삼성에버랜드 조경 전문직에 합격했다.

 나이를 한참이나 뛰어넘는 소신을 가진 이들도 많았다. 인천의 한 인문계 여고에 재학 중인 김모(18)양의 학업 성적을 보면 웬만한 대학에도 진학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과감히 방향을 바꿔 삼성SDS 근무를 앞두고 있다. 그는 지원 이유를 묻는 면접관에게 “대학에서 이론 공부를 하는 대신 현장에서 실무를 통해 업무 능력을 키워 회계분야의 리더가 되겠다”고 말해 높은 점수를 얻었다.

 삼성전자 원 팀장은 “이번에 뽑은 고졸 신입사원들을 보면, 나 스스로도 저렇게 강한 소신을 가져본 적이 있었나라고 자문할 만큼 주관이 뚜렷했다”고 토로했다. 원 팀장은 고졸 사원으로 입사하기 위한 몇 가지 조언도 했다. 우선 “고졸직에 전문대졸이나 대졸 학력자가 지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직무 배치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데다 기존 대졸 사원과 갈등을 빚을 수 있어서다. 그는 이어 “고졸 공채의 1차 관문 격인 필기시험은 학교 교과 과정과 일치한다기보다는 상식 차원의 것들이 많다”며 “대신 면접과정에선 지원자의 성장과정만 보는 게 아니라 즉석 실기 테스트 같은 걸 할 수도 있는 만큼 관련 분야 전공자가 유리한 점수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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