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흥종 목사의 삶과 실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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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한때 '최망치' 라는 별명으로 뒷골목의 주먹 세계에서 악명을 떨쳤던 오방의 인생 행로가 결정적으로 반전되는 계기는 이 땅에서 활동하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자기 희생을 체험하면서부터다.

피고름이 엉겨붙어 얼굴의 형체도 알 수 없이 문드러진 문둥이 여인, 그녀를 끌어안아 자신의 나귀에 태운 선교사는 문둥이 여인이 땅에 떨어뜨린 지팡이를 집어 달라고 마침 지나가던 최망치에게 부탁을 한다.

피고름 묻은 지팡이, 재촉하는 선교사, 선입견 때문에 망설이는 최망??외국인보다도 동포애가 없는 메마른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결국 최망치가 지팡이를 집어주는 것으로 '성자의 지팡이' 의 저자 문순태는 묘사하고 있다.

그 지팡이는 이후 가난하고 병들고 상처받은 이들의 몸과 영혼을 달래주는 성자의 지팡이가 된다.
신간 '성자의 지팡이' 는 오방의 극적인 삶을 충실하게 전하고 있다.

선교사들에게 의술을 배워 직접 문둥이들을 수술하고, 3.1운동에 참여하여 1년2개월의 옥고를 치르며, 5백명의 나병환자를 이끌고 광주에서 경성의 총독부까지 '구라(救癩) 행진' 을 통해 일본 총독으로부터 소록도 재활시설 확장을 이끌어내고, 농토를 빼앗겨 유랑하는 동포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시베리아로 두 차례나 선교사로 나간다.

나병환자들.걸인들과 생활하던 그는 55세가 되던 1935년 스스로 사망통지서를 돌리고 무등산에 들어가 세상을 등진다.

독립만세를 외쳤던 자들의 변절과 기독교계의 신사참배 결의에 실망한 그의 결단이었다.
스스로 거세하고 걸인과 병자들과 동고동락하는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랫동안 오방의 삶에 주목해왔던 사람 중의 한명인 신경림 시인은 "하나님 말씀에 충실한 기독교인으로, 세속적인 눈에 기인으로 보였을 뿐이었다" 며 "이념이나 종교의 잣대 안에 가두어선 안되는 그의 삶은 농촌붕괴 시기 빈민운동의 효시였다" 고 평가한다.

빈민 선교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오방의 말년은 사회활동 이상의 의미를 함축한다.
이 점은 기독교는 물론 전통종교에도 두루 밝았던 다석 유영모와의 교분이 낙이었다는 측면에서 읽힌다.

오방은 유영모와 도덕경을 담론하면서 "기독교의 진리와 노자의 도가 다른 것이 아니다" 고 언급한다.

그의 이런 말은 낮은 곳에서의 사회봉사와 저잣거리의 삶을 통해 외려 책상물림의 논리 이상의 통렬한 깨침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한국사회가 지구촌에서 흔치 않은 다종교 사회라는 점, 또 기독교 토착화라는 오랜 명제에 오방의 삶이야말로 무애(無碍) 의 행동반경을 확인시켜 준다?점에서 더욱 값지다.
문순태가 '오방〓영원한 자유인' 이라고 칭송하는 이유도 설득력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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