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딸에게 보내는 엽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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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정진홍
논설위원

#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겠다고 집을 떠난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돼 가는구나. 아빠가 어느 샘터에서 배낭을 내려놓은 채 마른 목을 축이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 내 배낭에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는 이들의 상징인 조개껍데기가 두 개 달려 있는 까닭을 물어 이렇게 대답했지. “하나는 내 것, 다른 하나는 내 딸의 것”이라고. 그래, 나는 이 길을 너와 함께 걷고 있단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칠 때, 오래된 산골마을에서 너 또래 아이들을 만났을 때, 그리고 아름다운 숲길을 걷는 내내 아빠는 너를 떠올리곤 해.

 # “왜 그 길을 걸으려고 하는 건데?” 서울에서 떠나오기 전에 네가 내게 물었지. 솔직히 그때는 다 말할 수 없었지만 이 길을 걸으면서 비로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단다. 그건 “어제와 다른 나를 만나고 또 만들고 싶어서”야. 벌써 십 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아빠는 이제껏 내가 제일 잘한 결정이 네가 태어나던 그해에 교수직을 그만둔 것이었다고 생각해왔어. 그러나 이제 그것을 바꿔야 할 거 같구나.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은 산티아고로 가는 이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결행한 일이라고.

 # 한 걸음 한 걸음이 인생이야. 아빠는 삶을 걸고 이 길을 걷고 있어.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은 사람은 수천, 수만 명이겠지만 내 발로 걸으면 그 길은 곧 나의 길인 거지. 지금 이 길을 걷는 아빠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단다. 발도 아프고 몸도 힘들지만 그래도 행복한 까닭은 내 안의 소리를 듣기 때문일 거야. 자기 속이 왜 우는지, 왜 웃는지 스스로에게 귀 기울여본 적이 별반 없었지. 그걸 듣고 아빠 자신을 용서하고 스스로 힘내라고 용기 북돋는 시간이기에 어쩜 이 길을 걷는 순간들이야말로 아빠 인생에서 자신을 가장 사랑한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어.

 # 나바레테라는 작은 마을을 지날 때였단다. 마을 입구에 옷 수선하는 곳이 있었지. 가시덤불에 잘못 들어가 겉옷이 여기저기 찢어져 이를 꿰매려고 문을 열고 들어섰단다. 아빠는 찢어지고 해진 옷을 벗어 짜깁기를 부탁했지. 키가 1m90㎝는 족히 될 것 같은 주인은 재봉틀 앞에 구부정하게 앉아 내 옷을 깁기 시작했어.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좀 지저분하게 기운 곳엔 이런저런 문양을 덧대주기까지 했어. 그런데 정작 옷 수선비는 한 푼도 받지 않는 거야. 그리 넉넉해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야. 순례자에겐 그렇게 한다는 거야. 오히려 내게 사과 두 개를 주기까지 했어. 그의 이름은 훌리안 엘리아스 깔보였지. 하지만 깔보라고 깔보면 안 돼.(웃음) 아빠는 두고두고 그의 이름을 기억할 거야. 그는 평생을 재봉틀 하나 붙잡고 살았겠지만 그야말로 작은 성인이었단다. 생 훌리안 엘리아스 깔보라고 불러야 마땅할 만큼.

 # 아빠는 눈보라 치는 피레네도 넘고 태양이 작열하는 길도 지났단다. 때로 폭우 속에 걷고 모래바람 이는 광야를 지나기도 했지. 하지만 그 어떤 난관의 돌파보다도 놀랍고 위대한 것은 누군가를 감동시키는 것이란 점을 깨닫는단다. 감동에는 크고 작음이 없어. 모든 감동은 작은 데서 나오지만 세상을 움직일 만큼 커진단다. 사실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만큼 아름다운 게 이 세상에 또 있겠니?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다. 내 딸아! 너도 세상을 감동시키는 사람으로 자라거라. 그것이 아빠의 바람이고 또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멋지게 되는 거야. 언젠가 먼 훗날 네가 아빠 나이 비슷한 때에 이 길을 걷기를 바란다. 그래서 아빠가 경험했던 이 감동을 너의 길에서 느끼고 배우기를 바라. 물론 그 감동은 내가 다 전할 수 없는 거란다. 네가 너의 두 발과 가슴으로 이 길을 걸음으로써 스스로 얻게 되고 알게 되고 배우게 되며 그것을 너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단다. 아빠는 다만 그 진실을 알려줄 뿐이란다. 그때 아빠가 걸었던 발자국은 사라졌겠지만 너를 생각하며 걸었던 마음의 자취만은 이 길에 남아 있을 거야.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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