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안 산적한 미·중, 속전속결 ‘물밑 합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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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2일 오후 3시10분 중국 외교부 정례 브리핑장. 류웨이민(劉爲民) 대변인의 얼굴이 밝지 않았다. 외신기자의 첫 질문이 나왔다. “천광청(陳光誠·41)의 미국 대사관 진입에 대해 중국은 미국의 내정간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사과를 요구할 생각은 없는가.”

 기다렸다는 듯이 류 대변인은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심지어 미국은 반성(反思)하라는 격한 말까지 구사했다. ‘反思(판쓰)’라는 단어는 지난 3월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重慶)시 서기를 향해 썼던 단어다. 당 간부의 실각이나 사법 처리를 예고할 때 주로 쓴다.

 사건 발생 후 침묵을 지키던 중국의 이날 격한 반응은 천광청 문제를 둘러싼 미·중 물밑 협상이 끝난 뒤 나온 것이다. 이는 중국 안팎을 동시에 겨냥한 것이란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번 사건을 조용히 넘길 경우 주요 2개국(G2·미국과 중국)으로서 위상이 손상되고, 미국에 저자세로 보일 수 있으며, 국내적으로 제2의 천광청 사건이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의식했다는 것이다.

 양국 간 고도의 합의에 따른 중국식 대응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로이터 통신은 이날 “미국과 중국은 천이 중국을 떠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그동안 긴밀하게 이 문제를 논의했고 협력했다”고 보도했다. 중국 당국이 천이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했고 그 가족들이 이미 베이징(北京)에 와 있다는 것은 양측 합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은 원칙적인 입장에서 격한 반응을 보이고 미국은 침묵하는 형태의 묵계가 있었을 것이라는 게 로이터의 분석이다.

 이는 천이 스스로 미국 대사관을 나온 이유와 직결된다. 천의 탈출을 도운 중국 인권운동가 쩡진옌(曾金燕)은 1일 “천이 중국의 인권 개선과 연금기간 중 자신과 가족(부인과 딸)에게 폭력을 가한 경찰 처벌, 가족 신변 안전 보장 등 세 가지 요구가 받아들여지면 대사관을 스스로 나가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중국 당국이 이 같은 조건을 전격 수용했고, 천은 스스로 대사관을 나왔다는 분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특히 미국이 중국과 사전 합의 없이 천을 대사관 밖으로 내보낼 리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양국 관계다. 당장 3일부터 베이징에서 열리는 미·중 전략경제대화가 꼬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루 만에 외교부의 격한 반응을 무시하고 양국 협력을 논의할 수는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물론 대화 자체가 무산되거나 사안에 대한 협의가 중단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양국은 협력 없이 국제사회 현안 해결이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G2로서의 국제적 위상을 확실히 다지려 했고 미국은 북한과 이란 핵 문제 등 산적한 국제적 현안에 중국의 도움을 요청할 계획이었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베이징에 도착한 날 천광청 문제를 서둘러 해결한 것도 서로의 부담을 줄여보자는 양국 수뇌부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향후 천의 신변 처리도 지켜볼 일이다. 중국 정부가 현재 그의 대학(로스쿨) 교육과 자유로운 활동 보장을 약속했다는 게 로이터 등 외신의 보도다. 그러나 그는 중국에 남아 인권보호 운동을 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앞으로 중국 사회의 아킬레스건인 인권 문제를 부각시킬 경우 중국 정부가 언제까지 그를 방치할지 미지수다. 1989년 천안문(天安門) 사태 당시 학생 대표 중 한 명이었던 왕단(王丹)은 “공안들이 어떤 합법적인 인권투쟁도 용납하지 않는 게 중국의 현실”이라며 “천이 중국에서 인권투쟁을 하겠다는 것은 이상일 뿐”이라고 우려했다.

베이징=최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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