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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나의 LG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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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선구
산업부장

참 잘 컸구나. 벌써 65주년. 지난달 창립기념식에서 우리 손자 구본무 회장께선 이렇게 말씀하셨다지. “백 년 넘게 영속하는 기업이 되겠다”고. ‘락희(樂喜·럭키)’란 이름으로 시작한 게 1947년. 지금 매출은 47만 배, 종업원 수는 1만 배로 늘어났으니 정말 대견스럽다. 백 년이 아니라 천년 만년 가야지.

 그런데 말이다. 요즘 위기라고 들었다. 특히 전자와 화학이 매우 어렵다고 하더라. 한때 시중에 나돈 ‘LG를 망친 세 마리 쥐’는 그저 웃자고 만든 거라고 치자. 전자업계 기자들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LG, 잘될 것 같아”라며? 다행히 1분기 실적이 그런대로 나와 한시름은 놓을 만하다. 일본 경쟁자들은 엄청난 적자를 냈으니 참 잘 선방했구나.

 하지만 선두업체들에 크게 뒤지고, 중국 기업들이 치고 올라오는 형국을 보면서 앞으로 설 자리가 있을지 걱정스러운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가 어떤 기업이더냐. 우리나라 처음으로 진공관 라디오를 만들었고, 선풍기·냉장고·흑백TV·에어컨을 잇따라 내놓은 자랑스러운 그룹이 아니더냐.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하더라. “스마트폰 물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신기술 투자에 주저한 탓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게 패착의 본질일까. 혹여 지나친 낙관과 안이함이 불러온 과오가 아닌지. 몇 년 전부터 ‘독한 LG’를 주창하고 있는 거 잘 안다. 독하고 강한 거 좋지. 그렇지만 어설프게 독하다간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오면 어쩔 것이냐. 이럴 땐 말이다. 우리의 본질, 창업 때의 정신을 다시 한번 곱씹어보고 가야지 싶다. 기본기부터 제대로 갖췄는지 검증하고 나서 독함을 강조하고 미래전략을 세우자는 얘기다.

 한창 사업에 재미를 붙일 무렵의 일이다. 빚보증을 서준 장사꾼이 있었지. 그는 고무공장을 운영하던 일본인에게 돈을 빌리고자 했는데, 일본인이 나의 보증을 받아오면 돈을 빌려주겠다고 했다지. 그런데 그만 그 장사꾼이 망하고 말았어. 급기야 일본인은 나를 저녁자리에 불러놓고는 “구 사장이 보증을 섰으니 안됐지만 변상을 하셔야 되겠습니다”라고 요구한 거야. 얼마나 난감했던지. 잠시 생각하다가 난 이렇게 대답했단다. “어쩔 수 없지요. 갚아 드리겠습니다. 책임지겠습니다.” 그러자 일본인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아니겠니. 진지한 나의 표정을 보던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지. “내 그럴 줄 알았소. 구 선생은 신용이 밑천 아니겠소. 대신 갚아주겠다는 말 한마디로 나는 만족하오.” 바로 신용이야말로 기업의 기본이란 점을 강조하고 싶구나. 소비자의 신뢰를 잃지만 않는다면 현재의 위기쯤이야.

 우리의 강점 인화(人和)에 대해서도 한마디 안 할 수 없다. 인화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LG가 유약해졌다는 비난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창업 초기를 보렴. 내 동생 태회와 평회, 그리고 외부에서 영입한 박승찬과 함께 똘똘 뭉쳐 그룹을 키우지 않았니. 이들의 고굉지로(股肱之勞 : 다리와 팔뚝에 비길 만큼 믿을 만한 사람들의 노력)를 내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아래 직원은 어땠고. 치약을 군대에 납품하려 했을 때다. 입찰에 사원 한 명을 보냈지. 최저가를 백원으로 잡으라는 지시와 함께. 그런데 이 친구가 현장에 가보니 백원 이하로 낙찰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며 88원을 써넣은 게 아니겠니. 경쟁사는 90원을 써냈고. 허허, 내 지시를 어기긴 했지만 군납 길이 트이면서 우리는 치약업계의 선두가 됐지. 지금 같으면 큰일 날 일이지만 그만큼 믿으면 맡기라는 거다. 지나친 인화에 유약해졌다는 소리는 순혈주의가 만연하고 신상필벌이 무뎌졌다는 뜻일 게다. 경영진이고 중간층이고 고굉지로 인재를 널리 수혈한 뒤 제대로 상 주고 벌주는 인화라면 어찌 좋지 않으랴.

 지금 어렵다고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거라. 내 아버지는 말씀하셨지. “세상을 얕보지 말고, 신용을 얻는 사람이 될 것이며, 일이 잘 안 된다고 주저앉지 말라”고.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 거창한 구호가 아닌 자기반성에서부터 돌파구를 찾아보라. ‘아! LG’라는 탄식이 ‘오! LG’라는 감탄으로 바뀌도록. 힘드냐. 그러면 내 이름 석 자를 다시 불러보렴. 구·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