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아버지도 똑같다, 자식 사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132쪽, 1만800원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추린다면, 마땅히 이 문장을 고르겠다. ‘그는 다만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애를 썼다.’(46쪽)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72)의 『남자의 자리』는 자리(혹은 위치, 또는 지위)에 관한 이야기다.

 누구의 자리인가. 가족의 남자, 아버지의 자리다. 책은 아버지가 죽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작가는 지극히 담담히 아버지의 죽음을 서술한다. 하도 객관적이어서 가슴이 더 먹먹해진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아버지의 시신은 비닐봉지에 넣어져 계단 위로 질질 끌리다시피 하여 관으로 옮겨졌다.’(15쪽)

 그러나 딸의 ‘자리’에서 작가는 이 장면을 잊지 못했던 것 같다. 왜 아니겠는가. 일평생 고작 소상인의 지위를 잃지 않으려 애썼던 아버지의 허망한 죽음이라니!

 그래서 작가는 아버지가 사망한 지 15년이 지나고서야 이 책을 집필했다. 책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해 아버지의 전 생애를 되짚는 방식으로 쓰여졌다. 그 아버지의 모습은 놀랍도록 우리네 아버지와 닮았다. 무뚝뚝하되, 속정은 깊은. 어려서 가난했던 아버지는 가난을 겨우 탈출하고서도 어떤 계급적 장벽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간다.

 딸은(그러니까 작가는) 부르주아 집안의 남자와 결혼해 초등학교 교사가 됐는데, 그게 아버지의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딸이 요약한 아버지의 삶이란 이런 것이었다.

 ‘아버지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됐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127쪽)

 아버지는 그렇다. 자식이 제 모자란 삶을 넘어서기를 바란다. 작가는 이 책에 대해 “내가 부유하고도 교양 있는 세계에 들어갈 때 그 문턱에 내려놓아야 했던 유산”이라고 설명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