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노동사회에서 벗어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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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의 위기는 97년 IMF 위기로 노골화된 것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한국인에 버금갈 정도로 한국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일의 홀거 하이데(브레멘 대학, 경상학부) 교수의 진단이다.

한국의 자본주의를 국가와 재벌의 복합체로 분석하는 그는 경제위기가 이미 80년대이후 전시기에 걸쳐 있었다고 본다. 그는 실제 지난 87년 노동자의 파업이 한창일 때 한국에 두 달간 체류하며 한국 경제의 특성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하이데 교수에게 독일 브레멘대학에서 직접 배운 강수돌(고려대, 국제정보경영학부) 교수를 비롯한 4명의 한국인 제자가 공동번역한 이 책은 그가 한국 방문이후 10여년간 지속해온 한국경제 연구성과를 총괄한 것이다.

90년대 중반까지는 계속 유입된 외자로 위험수위에 도달한 경상수지 적자를 그럭저럭 메울 수 있었다. 중공업과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한 고임금화는 이미 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는데, 기업과 은행의 유동성 위기등은 여전히 국가가 나서서 구제해 주는데 문제가 있었다.

경제의 국제적 기준과 세계 시장의 조건에 대한 적응을 지연시킨 결과, 정부가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가 허약해지고,급기야 IMF라는 폭력적 사태를 경험하게된다.

마르크스의 가치이론을 주요 방법론으로 채용하고 있는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40∼70년대 한국 자본주의 체제가 자리잡게 되는 과정을 정신분석적 방법으로 분석하는 점이다.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노동자 대중 동원의 진정한 원인을 그는 노동자의 피해의식, 두려움, 패배감에서 찾는다. 아시아 4마리 용 가운데 하나인 한국의 노동 분위기를 소위 '아시아적 정서'나 유교 문화에서 찾으려는 시도들은 그가 볼 때 충분하지 않다.

"해방이후 지속된 온갖 진보 세력이나 이념에 대한 척결과정이 심층적인 쇼크를 초래했고,이것은 결국 공격하는 자와의 자기 동일시를 집단적으로 불러 일으켰다.… 그 형태는 바로 반공 히스테리(레드 콤플렉스) 로 나타났다"는 그의 진단에서 주류 경제학자와는 확연히 다른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노동에 '중독'되는 사태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노동 중독의 문제는 자연과 생태계의 보전의 문제와 함께, 근대적 자본주의 사회의 동력으로부터 탈출구를 찾아보고자 하는 그의 최근의 관심거리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또 독일의 통일과정과 노동운동의 경험을 독일 좌파 지식인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들어 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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