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 책의 흐름]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출판시장도 가히 '유저(user) '의 시대다. 올해 체감 경제가 다시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면서 책 속에서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에 대한 실질적 해답을 찾으려는 소비자,즉 유저들이 전통적 의미의 독자인 '리더(reader) '를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7월에 나온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마라'는 이같은 배경을 업고 기록적인 성공을 거뒀다.출간 직후부터 각종 베스트셀러 집계에서 실용서로는 처음으로 종합 1위를 차지,올 상반기까지 최대 히트작을 유지했다. 관련 테이프 3종까지 합쳐 지금까지 90만부 이상 팔렸다.

책 속에서 저자가 추천한 '콜린스 코빌드'영영사전의 경우 1997년 정식 수입된 후 지난해까지 팔린 양(2만여부) 보다 올 상반기 판매량(3만여부) 이 훨씬 많았을 정도다.

보다 세부적인 성공 원인이라면 우선 '일본은 없다'류의 도발적인 제목이 영어 교육에 '한 많은' 한국인들의 심중을 건드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내용도 기존의 학교 교육에 정면 도전한다. 저자 정찬용씨는 영어를 모국어 배우듯 영어로 이해하고 습득해야지 한국어로 해석·번역하며 '공부'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면서, 속편 격인 '아직도영어공부 하니'에서는 "학생들이 영절하('영어공부 절대로 하지마라'의 준말) 컨셉을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학교 영어수업을 포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까지 주장한다.

그리고 지난해부터 계속되고 있는 영어공용화 논쟁과 조기유학 열풍으로 올해도 영어교육은 전사회적 화두였다.특히 토익이나 토플 교재류와 달리 '방법'에 관한 책이기 때문에 중 ·고등학생부터 직장인·전업주부에 이르기까지 영어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또 하나,독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최대한 이용한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실용서이면서도 K라는 여성동료를 등장시켜 대화형식으로 자신의 노하우를 풀어놓는 방법을 사용, 독자들의 긴장감을 적절히 조정하며 핵심을 전달한 책의 구성방식 말이다.

여기에 출판사측이 1월말 개설한 홈페이지(http://www.ksenglish.com)는 책 내용에 대해 저자와 독자간의 쌍방향 대화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물론,영어학습에 관심있는 네티즌들이 역으로 이 사이트부터 들러보고 책을 사게 만드는 효과도 가져왔다.

저자의 영어학습방식이나 주장에 대해서는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다.그러나 그것은 2차적인,독자의 선택사항이다.20세기 내내 한국 사회가 권력 접근을 위한 '만능열쇠'로써 목숨을 걸고 투자해온 학벌,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표현을 빌자면 '학력 자본'의 핵심은 이제 영어가 됐다. 더우기 경제 위기 속에서 이 책의 근본에 깔린 '세계화 시대에 영어는 사생결단의 문제'라는 전제는 이미 거역하기 힘들어졌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