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킬 수 없는 젊음 그리워하는 것, 그게 영화 ‘은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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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은교’에서 노시인 이적요를 연기한 박해일. 그는 “원작자 박범신씨가 캐스팅 자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내가 젊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분장한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벌써 충무로 생활 10년을 훌쩍 넘긴 배우 박해일(35). 안 그래도 동안인 그가 짧은 머리를 하고 멋쩍게 웃으니 영락없는 20대 청년 같다. 그런 박해일이 영화 ‘은교’(감독 정지우·26일 개봉)에서 겹겹의 분장을 하고 70대 노(老)시인(사진 아래)으로 연기했으니, 얼마나 갑갑했을까. 18일 서울 자양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삭발했던 머리카락이 봄볕 덕분인지 두 달 만에 빨리 자랐다”며 씩 웃었다.

 ‘은교’는 봄기운이 충만한 영화다. 박해일이 연기한 노시인 이적요는 새순처럼 풋풋한 17세 여고생 은교(김고은)에 매혹돼 사그라지던 순정을 개나리 꽃망울처럼 활짝 터뜨린다.

 그의 문하생인 젊은 소설가 서지우(김무열)는 그런 적요를 보며 진달래 같은 진홍빛 질투를 불태운다. 박범신의 동명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는 이들 셋 사이에 빚어지는 매혹과 질투, 연민의 소용돌이가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그린다. 게다가 성애 장면 농도가 제법 짙다.

 -전작 ‘최종병기 활’에 비해 감정 연기가 훨씬 복잡했을 텐데.

 “전작에서는 여동생을 구하겠다는 신념만 있었기 때문에 감정이 단순하고 폭이 컸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감정을 누르고 절제했다. 노시인의 연륜을 직관적이고 감정적으로 표현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

 -노인 연기를 위해 어떤 준비를 했나.

 “촬영 때마다 8시간씩 분장했고, 관록 있는 예술가들의 사진을 보며 그들의 걸음걸이, 뒤태를 흉내 냈다. 촬영 전 막걸리 사 들고 탑골공원에 가서 노인분들과 많은 얘기도 했다. 살아온 이력만큼 캐릭터들이 다양했다. 미니스커트 입은 20대 여성이 공원을 가로질러가는데 모든 노인들의 시선이 거기에 집중되는 걸 보며 ‘다들 비슷하구나’ 느꼈다. 나도 교복 입은 여학생뿐만 아니라 남학생을 봐도 그 젊음에 매혹된다. 이 영화는 그런 기분에서 출발하는 영화일 수도 있다.”

 -박범신 작가는 “죽는 것보다 나이 드는 게 두렵다”고 했다. 나이듦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적요가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고 연설하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 많은 생각을 했다. 40대가 되면 마음 속에 더 깊숙이 꽂힐 것 같다.”

 -은교에 대한 이적요의 감정을 정리한다면.

 “첫사랑에 빠진 소년의 순수한 감정? 관능적인 부분도 있지만 본질은 은교라는 매개체를 통해 돌이킬 수 없는 젊음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거죽이 바뀐다고 본질적 내면까지 변하는 건 아니다.”

 -신인배우 김고은과의 호흡은 어땠나.

 “처음 봤을 때 은교처럼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있는 걸 보고 ‘영화가 절반은 됐구나’ 확신했다. 적응도 빠르고, 호기심이 많았는데 그것도 은교 캐릭터와 똑같았다.”

 - 은교와 헤어진 뒤에 대한 묘사가 없다.

 “원작과 달리 결말을 열어둔 게 좋았다. 이적요가 남은 세월을 살면서 은교와의 추억을 노년의 과오라고 생각할지, 달콤한 꿈으로 간직할지는 관객이 판단할 부분이다.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적요가 환상 속에서 청년으로 돌아가 은교와 정사를 하는 장면은 욕정과 거리감이 있었다.

  “나와 김고은 모두 관능과는 다른 느낌을 갖고 촬영했다. 지우와 은교의 정사신은 욕정이지만, 적요와 은교의 정사신은 판타지와 정서적 교감이 더 강조됐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은.

 “은교가 누워있는 적요를 뒤에서 껴안으며 눈물 어린 이별을 통보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그 때 진실함과 어떤 힘이 느껴졌다. 시사회에서야 내가 그 때 눈물을 흘렸다는 걸 알았다.”

 - 캐릭터에서 빠져 나오려면 얼마나 걸릴까.

 “아직도 헤어나지 못했다. 말도, 생활의 리듬도 느려졌다. 빨리 헤어나려고 발버둥치고 싶진 않다. 가장 좋은 시기인 30대 중반에 연기한 이적요 역은 인생과 연기에 등불이 됐다.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고, 연기에서도 유연한 자신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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