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에 발목 잡힌 스페인, 국채 수익률 급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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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스페인 집값이 다시 추락했다. 지난달 11% 넘게 떨어졌다. 은행의 부실자산이 불어날 수 있다. 재정위기에 이은 금융위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마드리드의 한 시민이 부동산중개소의 쇼윈도를 가득 메우다시피 한 매물 또는 임대를 알리는 팻말을 살펴보고 있다. [마드리드=블룸버그 뉴스]

기어코 스페인이 위험지대에 들어섰다. 16일(현지시간) 유럽 채권시장에서 스페인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시장금리)이 연 6% 선을 돌파했다. 6.07%로 하루 거래를 마감했다. 지난해 12월 1일 이후 넉 달여 만에 처음이다. ‘마(魔)의 7%’까지는 1%포인트도 채 남겨두지 않았다.

 유로존(유로화 사용권) 국가 부채 규모에 비춰 10년물 국채 수익률이 7%를 넘어서면 채권 투자자가 등을 돌린다. 그리스·포르투갈·아일랜드가 하나같이 10년물 수익률이 7%를 넘어선 직후 얼마 버티지 못했다. 이들 나라가 국채를 내놓아도 투자자가 매수하려고 들지 않았다. 이른바 ‘채권 투자자의 파업’이다.

 위기 증상은 국채 수익률만이 아니었다. 신용디폴트스와프(CDS) 값은 사상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5년 만기 국채의 CDS 값이 583베이시스포인트(bp, 1bp=0.01%)를 넘어섰다. CDS 값은 채권자가 부도 사태를 대비해 드는 보험료다. 유로존 4위 경제대국인 스페인의 국가 부도 가능성이 대서양의 작은 섬나라인 아일랜드와 비슷한 수준으로 평가된 셈이다.

 마리아노 라호이(57) 스페인 총리가 다급해졌다. 유럽중앙은행(ECB)이 불 끄기에 나서지 않았다. ECB는 “이번 주 국채를 매입하지 않는다”고 이날 발표했다. ECB는 지난달 16일 이후 5주 연속 채권 매입을 하지 않았다.

 ECB는 그동안 유럽 국채시장의 특급 소방수 역할을 했다. 그리스·이탈리아·스페인 등의 국채 수익률이 위험 수준에 이르면 새로 찍어낸 유로화를 들고 나타나 국채를 대거 사들였다. 국채 값을 부양해 수익률을 낮추는 전술이다. “요즘 ECB가 시간을 끌면서 국채 매입에 선뜻 나서지 않고 있다”고 로이터 통신이 전했다.

 유럽의 맹주인 앙겔라 메르켈(58) 독일 총리의 도움도 기대하기 어렵다. 메르켈은 지방선거에 관심이 쏠려 있다. 독일 여론은 퍼주기식 구제금융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런 여론 때문인지 메르켈은 “빚을 많이 지고 있는 나라가 해야 할 일은 지출을 줄이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언뜻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구제금융보다 긴축 등 자구노력을 먼저 하라’는 뜻이 강하다.

 라호이는 급기야 지방정부를 닦달하기 시작했다. 이날 그는 “중앙정부가 방만한 지방정부를 직접 감시·감독하겠다”고 선언했다. 스페인 지방정부는 특유의 지역 갈등 구조 때문에 상당히 독자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하지만 구멍난 재정을 중앙정부의 도움을 받아 해결했다. 국가 부채 상황이 나빠지는 한 원인으로 꼽히는 이유다. 하지만 블룸버그 통신은 “정작 스페인의 화근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라고 전했다.

 바로 주택시장 ‘숙취(Hangover) 현상’이다. 집값 거품이 시원스럽게 무너지지 않다가 최근 다시 파열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페인 집값은 지난달 11%(전년 동기 대비) 넘게 추락했다. 이전까지 스페인 집값은 2007년 거품 정점에서 20% 남짓 떨어지는 데 그쳤다. 반면에 아일랜드는 50%, 미국은 30% 정도 추락했다.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유럽정책연구소 이사인 대니얼 그로스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거품이 덜 해소된 주택시장이 다시 추락하면서 재정·금융 위기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스페인의 불완전 거품 해소는 정부의 구제금융 탓이었다. 2008년 9월 미국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스페인 정부는 자국 은행 파산을 막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은행에 주입했다. 벼랑 끝에서 벗어난 은행이 주택자금을 다시 꿔주기 시작했다. 주택시장 거품 붕괴 과정이 일단 정지됐다. 하지만 그 결과는 국가재정 악화였다.

 전문가들은 스페인 상황이 ECB와 메르켈이 구제에 나설 때까지 악화할 것으로 내다봤다.

강남규 기자

신용디폴트스와프(CDS)

채무자의 채무 불이행을 대비해 채권자가 금융사와 맺어두는 일종의 보험 거래. 채권자는 보험료(프리미엄)를 금융사에 내고 채무 불이행이 되면 원리금(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 반면에 금융사는 채무 불이행이 일어나지 않으면 보험료를 수익으로 챙길 수 있다. 채무자인 국가나 기업의 부도 위험이 클수록 CDS 프리미엄이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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