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는 벤처들] 上. 금융사고지 왜 벤처사고냐

중앙일보

입력

벤처기업들이 화가 났다. 대표적인 사이비 벤처인 정현준.진승현 금융 스캔들의 여파로 기업환경이 사상 최악의 상태가 된 때문이다. 사건 이후 자금난 악화와 영업피해 등을 호소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M&A꾼' 들의 금융사고를 벤처인들은 어떻게 보고 있는지, 진짜 벤처를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본다.

"아니 정현준.진승현 사건이 어떻게 벤처가 일으킨 금융사고입니까. 돈맛에 빠진 20, 30대가 머니게임을 하다가 저지른 금융사기지요. 그런데 왜 우리가 도매금으로 넘어가야 합니까. "

인터넷 업체 A사의 李모 상무는 4일 "정현준.진승현 사건으로 4~5개 투자회사와 최근 진행 중이던 20억원 상당의 투자유치 협상이 모두 중단됐다" 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이 사건 이후 '벤처인〓사기꾼' 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투자회사들도 투자를 보류하고 있다" 고 말했다.

'무늬만 벤처' 가 기술개발에 열심인 '진짜 벤처' 를 옥죄고 있다.

중앙일보가 최근 벤처업계 최고경영자(CEO) 43명을 대상으로 '정현준.진승현 게이트' 관련 설문조사를 한 결과 CEO의 21%(9명)가 이번 사건의 여파로 회사 업무에 직접적인 피해를 봤다고 응답했다.

이들은 ▶투자협상 중단이나 지연▶제휴 중단이나 지연▶판매.영업활동 지장 등의 피해를 봤다고 호소했다.

지난달 28일 소프트웨어(SW)업체인 B사 사무실.

"시간을 갖고 좀 더 생각해 봅시다. (대기업 L사 관계자)"

"지난주까지만 해도 오늘 투자계약을 하기로 했지 않습니까.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꾸시는 겁니까. (B사 K사장)"

"상황이 바뀌어서…. (L사 관계자)"

회사 주력업종을 SW에서 인터넷 솔루션으로 전환하면서 잇따라 대기업의 투자유치를 받아내 다른 업체의 부러움을 샀던 B사는 며칠 전 '진승현 역풍' 을 맞았다.

K사장은 "기술개발과 공격적인 마케팅을 하기 위해서는 수십억원의 자금이 추가로 필요한데 투자업체에서 갑자기 태도를 바꿔 난감하다" 고 말했다.

벤처기업들은 정현준.진승현 사건으로 이미지가 실추돼 사업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고 하소연한다.

본사 설문조사에서도 벤처 CEO의 95%가 이번 사건의 여파로 벤처기업의 이미지가 큰 타격을 받았다고 응답했다.

지난해보다 매출이 1백50% 늘어난 디지털 영상솔루션 개발업체인 3R의 장성익 사장은 요즘 투자자들로부터 '거기는 괜찮으냐' 는 전화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張사장은 "벤처업체의 지분을 갖고 '돈놀이' 를 하는 사람까지 벤처기업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면서 "재벌기업 회장이 벤처 지분을 갖고 있으면 이들을 벤처기업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 고 반문했다.

CEO 설문 결과 '앞으로 제2, 제3의 정현준.진승현 사건이 일어날 것으로 보는가' 라는 질문에 '그렇다' 고 응답한 사람이 75%에 달할 정도로 이들이 느끼는 '벤처 사고' 에 대한 불안감은 컸다.

특히 응답자의 60%가 현재 벤처기업 중에서 무늬만 벤처의 비중이 30% 이상이라고 답해 '벤처같지 않은 벤처' 가 깊숙이 퍼져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늬만 벤처' 의 무분별한 확장 행태에 '진짜 벤처' 가 흔들리기도 한다.

기업간 전자상거래(B2B) 솔루션업체인 N사의 李모 사장은 얼마 전 코스닥 시장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는 C사로부터 '회사를 50억원에 넘기라' 는 은밀한 제의를 받았다.

李사장은 "그 업체의 B2B 전문가라는 사람의 기술이 거의 초보수준이여서 머니게임을 하려는 것 같아 제의를 거절했다" 면서 "요즘같이 쪼들릴 때는 차라리 돈 많이 주는 업체에 회사를 넘기고 싶은 심정" 이라고 털어놓았다.

李사장은 실제로 이런 제의에 회사를 넘기는 업체도 상당수 있다고 귀띔했다.

머니게임을 하는 업체는 투자자들에게 그럴 듯하게 보여서 좋고 벤처업체는 프리미엄을 얹어 회사를 팔아 이익이기 때문이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고 있다' 는 얘기다.

CEO들은 벤처기업이 포함된 금융사고가 터지고 있는 이유로 ▶투자자들의 한탕주의(32%)▶허점많은 각종 제도(19%)▶정치권의 부도덕성(17%) 등을 꼽았다.

삼성경제연구소 윤종언 산업연구실장은 무늬만 벤처가 활개치는 데 대해 "정부가 벤처의 범위와 조건을 정해 벤처를 육성하면서 그 범위에만 들어가면 면죄부가 주어지는 역효과가 나타났기 때문" 이라며 "초기 육성단계에서는 정부주도의 벤처육성이 효과를 발휘했지만 이젠 시장기능에 맡겨야 할 때" 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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