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축구, 지금부터 부활하자

중앙일보

입력

2000년 한국축구 성적표는 한마디로 'all F'.

'맏형'격인 국가대표팀은 올림픽 8강 진출 실패와 지난 10월 아시안컵대회에서 졸전에 졸전을 거듭하며 4강 탈락이라는 쓴잔을 들이켰다.

동생격인 19세 이하 대표팀은 예선전 對중국전 패배를 극복하지 못하고 4강 문턱 조차 밟지 못했다. 일반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막내격인 16세 이하 대표팀도 중국에 덜미를 잡히면서 예선 탈락의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한국축구 '총체적 위기상황'이다. 준비된 투자없이는 보상이 따르지 않는 세상 이치가 스포츠 세계에서도 결코 예외일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이천수, 최대욱, 조재진 등 역대 최고의 공격진을 앞세워 대회 3연패를 호언장담하면서 이란 원정길을 나섰던 청소년 대표팀의 4강탈락은 우리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역시 골결정력 부족이었다. 이천수, 최태욱, 조재진 공격 3인방은 중국,이라크를 상대로 단 한 골도 기록하지 못하는 빈약한 골결정력을 드러냈다. 숱한 세트플레이 기회도 득점으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충분히 기량을 지닌 3인방 공격수 모두 개인능력에만 의존했지 조직적이고 세밀한 플레이를 펼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인기나 체력에서 비등한 이라크나 중국이 수비중심의 경기운영을 펼쳤을 때 세밀한 조직력과 정확한 볼 키핑 능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득점을 올릴 수 없다. 결국 개인기를 갖춘 소수의 선수만을 믿고 3회연속우승을 은근히 바랬던 우리의 기대는 애당초 이루지 못할 허상이었음이 증명됐다.

한국축구의 '중심축' 이라고 할 수 있는 국내프로축구의 현실도 어둡기는 마찬가지다. 올 시즌 정규리그 1위와 2위는 작년 시즌 최하위를 다퉜던 '안양 LG' 와 '성남 일화'였다.

작년 시즌 우승팀 '수원 삼성'과 '현대 아이콘스'는 약속이나 한듯 하위권으로 주저앉았다. 스타급 선수 한두 명이 팀을 떠나거나 부상으로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면 전년(前年)우승팀도 여지없이 하위권으로 곤두박질 치는 것이 종이장처럼 얇은 한국프로축구의 현주소다.

한국축구가 더 이상의 추락 없이 '아시아 정상'을 탈환하고, 세계무대에서 당당히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지금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먼저, 클럽 시스템을 부분적이나마 도입해서 학원스포츠와 병행해야 할 것이다. 현재 학원스포츠는 한국축구의 토양 역할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맹목적으로 승리에만 집착하는 학원스포츠 아래에서는 어린 선수들이 무엇보다 착실히 다져야 될 착실한 기본기 습득은 요원한 일로 느껴진다.

클럽시스템은 착실한 기본기 배양과 운동선수로서 갖춰야 할 기본소양에 역점을 둠으로써 양과 질 모든 면에서 한국축구를 보다 튼튼하게 받쳐줄 건전한 토양으로 작용할 것이다.

둘째로, 뜻있는 축구인의 지적대로 유소년-청소년-성인 대표팀 간에 유기적인 협조체제가 필요하다. 성인대표팀 지도자가 유소년, 청소년 대표팀 관리를 맡아 어린 선수들이 한국축구의 도량(塗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세째로, 실전에서 이미 경쟁력을 상실한 한국축구의 전략과 전술을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한다.

강팀과 맞부딪쳤을 때 늘상 부르짖는 '찰거머리 수비'는 후진축구에서 볼 수 있는 안일한 수비전술 중의 하나다. 한두 명 전방공격수에 팀득점을 의지하는 공격전술 또한 후진축구의 본보기다. 이번 기회에 현대축구 흐름에 부합하는 전략과 전술에 대해서도 심각한 고민이 따라야 하겠다.

축구협회에서 추진 중인 대표팀 감독 인선 과정에서 네덜란드 출신 '구스 히딩크'가 유력한 차기감독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이유는 이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히딩크가 추구하는 축구스타일은 네덜란드, 그리고 현재 일본팀이 펼치는 경기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4-4-2 포메이션을 바탕으로 강력한 미드필드 지역 압박을 통한 빠른 공-수 전환이 가장 두드러진 특색이다. 대인방어를 지양하고, 지역방어를 수비에서 선호한다. 공을 가진 상대공격수를 사방에서 에어싸면서 순간순간 압박해 빠른 역습을 시도하고, 공격시에는 2:1 내지는 1:1 부분전술을 자주 구사하면서 조직적인 공격을 펼친다.

그가 감독으로 부임한다고 해서 당장 한국축구가 나아진다는 생각은 섣부른 판단으로 보인다. 히딩크가 구사하는 작전이 위력을 발휘하려면 선수 전원이 일정 수준 이상의 기술과 조직력, 전략과 전술을 소화해내는 경기감각을 갖춰야 한다. 당장에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가장 선진축구에 근접해 있는 네덜란드 출신 감독 히딩크 영입을 통해 대표팀 경기력 향상에 일조(一助)할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사실 2002월드컵에서 온 국민이 염원하는 16강 진출 이상의 성적을 거둔다는 것은 여러가지 상황에 비춰 실현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

일본이 15년 동안 온갖 정성을 쏟아 세계수준에 근접했고, 중국이 8년 이상 심혈을 기울여 아시아 정상권에 도달한 사례를 통해서도 2년 앞으로 다가온 월드컵에서 단 열매를 기대한다는 것은 과욕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진정 한국축구가 축구강국 반열에 오르기를 바란다면 더 이상 지체해서는 곤란하다. 축구 인프라(잔디구장 확보 및 우수선수 육성체계 등)를 착실히 갖춰나가면서, 대표팀 실력 향상을 위한 노력을 병행해 나가야 한다.

한국축구 부활을 위해서 더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다. 모든 것을 잃다시피한 지금이 '최적의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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