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위크]닷컴 추락을 즐기는 사람들

중앙일보

입력

미국 캘리포니아州 포톨라 밸리 출신인 제이슨 워드는 1997년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갔을 때 그곳의 달라진 모습에 크게 실망했다. 레드우드 언덕은 닷컴 기업인들의 소굴이 돼 있었다. 단골 술집은 휴대폰을 들고 통화하거나, 랩톱 컴퓨터를 두드리고, 스톡 옵션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또 시골길은 스판덱스 운동복에 경주용 티타늄 자전거를 탄 여피족으로 붐비고, 젊은 인터넷 갑부들은 팔려고 내놓지도 않은 이웃집 문을 두드려 엄청난 가격을 제시하며 집을 팔라고 말하는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그래서 워드는 일종의 자존심 있는 반란을 일으켰다. ‘나는 실리콘 밸리를 날려버리고 싶다’(I Want to Blow Up Silicon Valley)
라는 독립 영화를 제작한 것이다.

요즘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의 분위기로 볼 때 실리콘 밸리의 신흥갑부들에게 반감을 품은 사람은 워드뿐이 아니다. 오랫동안 밉살스러울 정도로 떵떵거리던 자칭 新경제의 수도 실리콘 밸리는 내리막길로 접어드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주가 폭락에서 닷컴 파산까지 인터넷 거물들이 갑자기 휘청거리고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서류상 재산이 주가 최고점에 비교해 90% 이상 감소한 닷컴 갑부들의 명단인 이른바 ‘90% 클럽’을 1면 박스 기사로 싣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에서는 임시해고된 사람들에게 구직 정보를 주기 위한 ‘핑크 슬립’(해고통지서)
파티가 열린다.

경제 호황에서 소외됐다고 느꼈던 많은 사람들이 신흥갑부들의 파산을 아주 고소해하는 것 같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사회복지 관련 일을 하는 리처드 마르케스는 “그들 중 한 회사의 자금이 바닥났다는 소식을 듣고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그들은 지역사회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독일어에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기뻐하는 인간의 충동’을 뜻하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라는 단어가 있다. 스톡옵션이라곤 구경도 못 해보고 벤처 투자가와 점심 한끼 먹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을 정의(正義)
라고 말할지 모른다. 근저(近著)
‘다른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때’(가제·When Bad Things Happen to Other People)
에서 샤덴프로이데 현상을 연구한 버지니아大 철학자 존 포트먼은 “우리는 어떤 측면에서 볼 때 24세의 젊은이가 그런 거액의 은행 계좌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거만한 부자들이 망하는 것을 보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만족감을 준다”고 말했다.

그러나 요즘 미국에서 일고 있는 샤덴프로이데 현상은 단순한 시기심 이상의 감정이다. 그것은 애송이 갑부들에 의해 움직이는 세상에서 소외되는 것과, 현기증날 정도로 급변하는 테크놀로지 시대에 뒤처지는 것에 대한 중산층의 깊은 두려움을 반영한다. 물론 미국의 중산층은 은퇴연금의 상승부터 휴대폰·팜파일럿의 대중화에 이르기까지 하이테크 붐의 모든 혜택을 누렸다.

그러나 시장의 열기가 식고 인터넷의 신선함이 시들해지면서 그동안 조롱의 대상이 됐던 舊경제(대다수 사람들의 가치관과 기대를 형성한 토대)
가 아직도 존재한다는 데 대한 안도감이 은연중에 확산되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의 질투심에 대해 연구한 오하이오 주립大 심리학자 스티븐 라이스는 ‘호황의 수혜자들은 사기꾼’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면서 “사람들은 전통적인 가치관이 회복되고, 그것에 도전했던 사람들이 처벌받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실리콘 밸리에서 일고 있는 샤덴프로이데 현상은 독일어를 몰라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거리의 간판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멀티미디어 단지 중심부에 있는 최신 가구점 ‘림’의 거대한 옥외 광고판에는 회사 웹사이트 주소의 ‘www’와 ‘.com’ 위에 붉은색으로 커다란 X자들이 그려져 있고, ‘진짜 세상으로 돌아가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자신의 웹사이트를 임시 폐쇄한 림의 소유주 댄 프리드랜더는 “웹사이트란 것이 정말 우스워 보였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사람들은 웹사이트에서 원하는 정보를 찾지 못하면 짜증이 나서 전화를 건다. 그럴 때 나는 그들이 다른 도시에라도 있나 해서 ‘지금 어디 계시나요?’라고 묻지만 그들은 고작해야 다섯 블록 떨어진 곳에 있다. ‘여기로 와서 물건을 직접 만져 보시지요’라는 내 말에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요’라고 대답한다.”

샌프란시스코의 샤덴프로이데 현상은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근로자 계층이 모여 사는 미션 디스트릭트에 오랫동안 거주해온 주민들은 동네를 인터넷 창업회사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e-무법자’들의 침입에 반기를 들고 있다. 현지 운동가들은 더 이상의 닷컴 사무실 개발을 금지하는 주민투표 발의안을 지지하고 있으며 시위대의 연좌농성 때문에 대다수 인터넷 사무실 건물에는 경비원들이 배치돼 있다. 최근에는 인터넷 종사자들이 주로 찾는 레스토랑에서 손님들의 대리주차권이 도난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차주들은 자신의 사브나 랜드로버 자동차를 찾기 위해 동네 골목을 헤매고 다녀야 했다. 일을 꾸민 사람들은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박장대소했다.

영화 ‘나는 실리콘 밸리를 날려버리고 싶다’에서 감독 제이슨 워드의 분신(分身)
인 주인공은 과일나무 언덕과 작은 마을의 소박한 삶이 사라져버린 천국을 한탄한다. 그와 그의 해커 친구는 자동차와 사람들로 붐비고 스모그가 꽉 찬 밸리의 모든 컴퓨터에 e메일 폭탄을 발사한다. 워드는 인터넷 문화에 질린 하이테크 종사자들로부터 자신을 지지하는 내용의 e메일을 받고 놀랐다고 말했다.

림 가구의 소유주 댄 프리드랜더는 웹사이트에 의존하는 고객들에게 본래의 자아와 교류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는 최근 손님들에게 ‘들어와서 휴대폰을 끄고 쉴 것’을 권하는 새로운 카페를 열었다. 그 카페에는 손님이 들끓는다.(Karen Breslau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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