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판타지 소설 '신화' 절반의 성공

중앙일보

입력

사십대 중반인 처지에 요즈음 20대 젊은 층에서 즐겨 읽는다는 '신화' 를 읽는 일은 고백컨대 힘이 부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이른바 판타지이니 자유롭게 이야기가 비상하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지만 예전에 읽었던 무협소설적 내용들이 끼어들고 치기가 가시지 않은 농담들이 반복되는데 식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세대를 읽어내기 위해서라도' 하는 작심 만은 아니었지만, 이틀만에 나는 책 세권을 모두 읽고 말았으며 다음 권은 어떻게 될 것인가가 궁금해지는 나를 보고 약간 놀라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중학교 시절 김장철을 떠올렸고 간단한 심부름을 하고 얻어먹는 배추꼬랑이의 맛을 떠올렸다. 군것질할 것이 별로 없던 시절에 그것은 얼마나 달곰쌉쌀했던가.

'신화' 는 자연과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소년 하청린이 장백산을 배경으로 여러 가지 사건을 겪다가 마침내 장백산의 산신령이 되어 마귀와 마인을 물리치고 의로운 죽음을 겪게 되는 이야기다.

다람쥐.여우.호랑이.거북 등이 등장해 인간인 하청린과 협력, 마귀와 마계를 물리치는 갖가지 사례들이 담겨 있으며 단군설화가 변용되어 섞이고 흥부전의 이야기가 재미나게 변주된다.

특히 기왕의 다른 작품과 달리 서양의 신화나 설화를 골격으로 차용하는 대신 우리의 신화나 설화를 도입, 새롭게 시도했다는 점에서 판타지 소설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여러 가지 점에서 그 판단을 유보하고 싶다.

단군설화를 서양식의 창조설화에 무리하게 끼워 맞추려 했다든가, PC 통신에 연재할 때나 통용될 수 있는 작가의 돌연한 노출 등등 미흡한 점이 자주 눈에 띄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평가의 유보는 이른바 판타지 문학 전반이 아직은 하나의 장르라기보다 '게임 문학.만화.애니메이션.음악 등 여러 문화를 관통'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성립 가능성으로서의 한 문학장르' 라는 점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생명과 죽음, 현실과 비현실이 선명하게 갈라지면서 마침내 선하고 좋은 것이 이기고 만다는 구조를 가진 이런 이야기들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대리만족의 위안을 주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또한 너무나 현실의 압박이 많은 청소년들에게 얼마간 휴식공간을 준다는 점에서 그 효용성은 유지될 것이다.

그렇지만 배추꼬랑이가 요기가 될 수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판타지 소설에 그런 것까지 주문하는 것은 너무 이른 주문일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