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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고 분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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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정재
경제부장

복지를 낳은 건 정치다. 시작도 좌파가 아니라 우파다.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창시자다. 그는 1880년 건강보험과 노령연금을 첫 도입했는데 목적도 이유도 정치적이다. 어찌 보면 교활하다 싶을 정도다. 그는 “연금 받는 이들이 느끼는 보수적인 심리 상태를 수많은 무산자로부터 끌어내는 것”이 목적이며, 이유는 “노령연금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다루기 쉽기 때문”이라고 했다. 비스마르크에게 복지는 권력 쟁취의 수단이었던 셈이다. 그는 “누구든 이 개념을 포용하는 자가 권력을 잡는다”고 말했다. 곧 따라 한 게 영국이다. 영국은 1908년 국가 연금제를 도입했다. 좌파인 자유당 출신 재무장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주도했다. 독일 우파에 이어 영국 좌파까지 복지를 수용하면서, 이후 복지경쟁엔 좌우가 따로 없게 됐다.

 이렇게 보면 요즘 국내 정치권의 복지경쟁도 이해는 간다. 총선용으로만 새누리당은 5년간 89조원, 민주통합당은 164조8000억원의 복지공약을 내놨다. ‘복지=표’로 보는 여야가 퍼주기 시합 중인 셈이다. 대선 때면 더 늘어날 게 뻔하다. 문제는 부작용이다. 벌써 복지에 밀려 평화·정의·성장 등 중요한 국가 담론들이 왕따 신세다. 집권 후 국가 운영 그림도 잘 안 보인다.

 당장 복지의 방법론부터 걱정이다. 주로 나누기다. 더하기나 곱하기는 연산 방식에서 빠진 지 오래다. 분배만 있지 성장 담론은 없다는 얘기다. 노무현 정권 말인 5년 전과는 정반대다. 당시엔 ‘무조건 노무현과 반대로 하면 된다’며 ‘분배 대신 성장’이 대세였다. 요즘은 어떤가. 말 그대로 ‘닥치고 분배’다. 그렇다고 ‘닥치고 분배’는 쉬운가. 최소한 다섯 가지가 해결돼야 가능할 일이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첫째, 말보다 실천이다. 말은 쉽다. 그러나 실천, 돈 마련은 쉽지 않다. 총선 복지공약만 해도 그렇다. 여야는 세금 안 올리고 나랏빚 안 늘리고 해결하겠다고 한다. 방법은 덜 쓰고 많이 걷겠다는 거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그리 쉽게 될 일이면 과거 정부는 왜 안 했겠느냐”고 묻는다.

 둘째, 지속 가능해야 한다. 단기간 퍼주기는 쉽다. 그러나 장기간은 불가능하다. 오죽하면 지난달 기획재정부 2차관이 “이대로 가면(정치권 복지 공약을 다 지키면) 재앙이 온다”고까지 했을까. 재정부 계산으론 여야 복지공약을 지키려면 어림잡아 해마다 55조원이 추가로 든다. 올해 복지 예산의 절반쯤이다. 그렇게 38년이 지나면 “2050년엔 나랏빚이 측정불가가 된다”고 봤다.

 셋째, 공정하게 나눠야 한다. 공정은 ‘누구나 똑같이’와 좀 다르다. 있는 사람에겐 덜 줄 것인지, 모두 똑같이 줄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 무상 보육이냐 무상 급식이냐, 사안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잘못 다루면 큰 혼란이 온다. 빵 하나를 둘이 나누긴 비교적 쉽다. 그러나 100명이 나누는 데는 큰 지혜가 필요하다.

 넷째, 파이를 키워야 한다. 이를 위해 이명박 정부는 부자가 돈을 쓰게 하면 서민에게 혜택이 흘러내리게 된다는 ‘트리클 다운(낙수론)’ 정책을 폈지만, 효과를 못 봤다. 나누기도 마찬가지다. 분배만으론 소비가 살고 경제가 커지기 어렵다. 적절한 성장 담론이 있어야 한다.

 다섯째, 있는 걸 나누기(분배)에 비해 새로 걷어 나누기(재분배)엔 더 큰 정치력이 필요하다. 있다가 없어지면 더 좌절하고 못 견뎌 하는 게 인간 심리다. 이른바 ‘소유효과(Endowment Effect)’다. 여야는 지난해 말 3억원 초과 소득자에 대해 기존 최고세율 35%에 3%포인트를 더해 과세하기로 했다. 이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여야 의원들은 몰래 만나 기습적으로 해치웠다. 보수층의 반발을 우려해서다. 그렇게 해서 더 거둬들이는 돈이 한 해 고작 7700억원이다. 여야가 구상 중인 분배를 이루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뭐든 지나치면 탈이 난다. 버스가 급히 왼쪽으로 틀면 승객은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인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다. 정치권은 최소한 위 다섯 가지 물음에 답을 내놔야 한다. 그런 다음에도 계속 외칠 건지 따져봐야 한다. ‘닥치고 분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