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증' 성폭행범 기록 보다 깜짝, 정신과 찾아간 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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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형사재판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20대 후반의 피고인이 자신에게 정신병이 있다면서 병력조회신청을 했다. 그는 여자만 사는 원룸에 들어가 성폭행하고 돈을 빼앗는 상습적인 강도강간범이었다. 범행수법이 지능적이며 대담했고 피해자도 여럿이었다. 건강해 보여서 정신병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사실조회신청을 받아들였다. 얼마 후 병원에서 그가 불면증이 심해 한 차례 치료했다는 회보가 왔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에게서 심한 폭행을 당했고, 어머니가 가출해 상처가 커서 이상심리가 생겼으며, 이로 인해 성범죄를 저질렀으므로 형을 감경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기록을 검토하다 깜짝 놀랐다. 그가 정신과에 찾아간 날이 강도 범행을 저지른 바로 그날 아닌가. 그는 이른 새벽에 강도짓을 하고 그날 오후에 정신과에 들렀던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이 상처를 받아 범죄자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정작 다른 사람들에게는 끔찍한 상처를 주며 삶을 파괴하고 있다니. 그는 자신이 희생자라고 억울해 할 뿐, 자신의 잘못과 책임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았다. 법정에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피고인의 상처만 중요합니까? 다른 사람에게 그런 고통을 주면서 피고인의 상처와 불면증이 나을 것 같아요?”

파스칼 부르크너는 이러한 태도를 ‘유아적 엄살’이라고 부르며, 이를 예전엔 볼 수 없었던 현대인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이 자기의 문제와 상처만 들여다보면서 무기력과 우울에 빠져 살아간다. 자신은 부모·학교·사회의 희생자라면서 이들을 원망하고 지낸다. 자기 상처를 살펴 달라고, 자기를 보살펴 달라고 어린애처럼 징징대기만 하지, 스스로 일어설 마음을 갖지 않는다. 나에게 상처를 주어 내 삶을 망쳐놓은 사람을 비난하는 운명적인 희생자로 지내는 편을 택하고, 삶을 주관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자기 책임을 직면하지 못하는 ‘어른 아이’인 셈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 현상이 더 심한 듯하다. 자기 책임을 인정하는 모습을 찾기 어렵고 매사에 다른 사람, 다른 조직을 탓하는 데 힘을 소모한다. 개인적 차원을 넘어 일종의 사회적 생존 전략의 하나로까지 변한 것 아닐까 걱정된다.

이 문제에 관해 그리스 신화인 오레스테스 이야기만큼 의미심장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인간인 오레스테스의 할아버지가 신들에게 대항하자 분노한 신들이 저주를 내린다. 그의 어머니로 하여금 아버지를 살해하게 한 것이다. 그리스 법에 따르면 아들은 아버지의 살인자를 죽여야 할 의무가 있으나, 반면 가장 큰 죄는 자식이 어머니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는 극심한 고뇌 끝에 자신의 의무를 좇아 어머니를 죽인다. 신들은 그에게 악령을 보내어 밤낮으로 환청과 환영에 시달리도록 벌을 내린다.

끔찍한 고통을 겪은 그는 신들에게 벌을 면해 줄 것을 요청했고, 아폴로 신은 다른 신들에게 자신이 이 저주를 일으켰으므로 그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변호한다. 그러나 이때 그는 펄쩍 뛰면서 변호자인 아폴로를 반박한다. “내 어머니를 죽인 것은 나이지, 아폴로가 아닙니다.” 신들은 깜짝 놀란다. 그의 가문에서 남을 비난하지 않고 스스로 책임을 떠맡은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신들은 저주를 풀고 악령을 지혜의 정령으로 변화시켜 준다. 극심한 고통을 받던 사람이 지혜롭고 행복한 사람으로 변화한 것이다.

그는 할아버지의 죄로 천벌을 받은 억울한 희생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부당한 고통을 당했다고 여기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살인 행위 자체는 자신이 저지른 것이므로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현재 상황이 자기 삶의 고유한 부분임을 인정한 것이다. 나의 상처와 상황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오레스테스가 자기 삶에 철저히 직면했을 때 악령이 떠난 사실이 그 해답을 알려준다.

앞의 강도범이 불면증을 치유하려면 정신과를 찾기에 앞서 자기 삶을 책임지겠다고 결심하고 상습적인 범죄 행각을 중단해야 하였을 것이다. 이 청년뿐이겠는가. 누구나 크건 작건 상처를 지니고 있고, 자기 삶을 직면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언제까지 남 탓만 할 것인가. 자기 삶을 대신 살아 줄 사람은 없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자기 고유한 부분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일어설 때 진정한 자기 삶이 시작될 것이다.



윤재윤 춘천지방법원장을 마지막으로 30여 년간의 법관생활을 마쳤다. 철우언론법상을 받았으며, 수필집 『우는 사람과 함께 울라』를 펴냈다.

윤재윤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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