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셋 3박4일 1km절벽서 쪽잠 자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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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대가 피츠로이 수직 암벽을 오르고 있다. 이들은 로프와 고정물을 이용해 알파인 방식으로 등정에 성공했다. [파타고니아원정대 제공]
피츠로이 에 오른 한미선·이명희·채미선씨(왼쪽부터).

대한민국의 아줌마 등반가들이 3박4일의 사투 끝에 1000m가 넘는 수직 암벽을 정복했다. 험하기로 소문난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산군(山群) 피츠로이(3405m) 등정에 성공한 것이다.

 이명희(39)·한미선(40)·채미선(40)씨로 꾸려진 파타고니아원정대(한국산악회 후원)는 지난 2월 23일 리오블랑코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3박4일을 등반한 끝에 26일 오후 5시(현지시간) 피츠로이 정상을 밟았다. 피츠로이에는 등반 길이가 1050m에 이르는 세계 최고 난도의 암벽이 있다. 또 파타고니아 산군은 ‘지도상의 공백’이라 불리는 세계의 오지로, 악천후로 인해 등반할 수 있는 날이 연중 한 달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원정대는 폭설로 인해 벽 하단에서 20일을 대기해야만 했다. 원정대는 등정 후 곧바로 파타고니아 북부 바릴로체 산군에 있는 세로카테드랄(2830m)을 추가로 등반한 뒤 10일 하산했다.

 이씨는 12일 본지와 통화에서 “기상이 악화돼 세 차례 시도 끝에 올랐다. 체력적으로 힘들었지만 셋이 모두 정상에 올라 기쁘다”고 말했다. 원정대는 경사가 수직에 가까운 피츠로이 남동릉을 알파인 스타일로 도전했다. 60m 길이 로프 2동을 이용해 세 명이 교대로 앞장서며 마의 벽을 돌파했다. 한 피치(60m) 오를 때마다 확보물(바위나 눈에 박는 하켄 또는 스노바)을 하나씩 박고, 올라온 뒤에는 모두 회수해야 하는 험난한 작업이다. 이 때문에 속공 등반이 성공의 관건이다. 이들은 무게를 줄이기 위해 텐트·침낭 없이 등반했다. 물 끓이는 시간을 아끼려고 얼음을 깨 먹으며 수분을 보충했다. 한씨는 “짐을 최소화하기 위해 총 식량 무게를 500g으로 줄였다. 분말 수프 한 개를 셋이 나눠 먹고 하루를 버텼다”고 했다. 채씨는 “벽 상단부를 오른 이틀 동안, 엉덩이만 살짝 걸치고 쪽잠을 잤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서러웠지만 정상에 섰을 때는 뿌듯했다”고 했다.

 산악계의 반응은 뜨겁다. 한국산악회 강구영 이사는 “여성만으로 꾸려진 팀이 피츠로이를 등반한 일은 한국 여성 등반사는 물론 세계 여성 산악사에서도 의미 있는 일”이라며 “아시아 여성팀으로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남선우 한국등산연구소장은 “여성팀 최초라는 타이틀보다는 피츠로이 등반 자체만으로도 알피니즘의 본질을 추구한 쾌거”라고 평가했다.

 피츠로이 원정대는 모두 기혼이다. 이명희·한미선씨는 각각 10살 아들, 11살 딸을 둔 어머니다. 그러나 ‘아줌마’가 핸디캡이 되지 않았다. 이씨는 “같은 여자라서 체력과 신체 리듬, 등반 철학이 잘 맞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족들이 눈에 밟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씨는 “원정을 올 때마다 아들이 걱정됐지만 오히려 아들은 ‘잘 다녀오세요’라며 엄마를 안심시켰다”고 했다. 원정대는 주부답게 살림 또한 단출했다. 원정 비용은 한국산악회에서 지원받은 2000만원, 짐도 150㎏뿐이었다.

 이들의 인연은 ‘누가 등반을 잘한다더라’는 입소문을 통해 맺어졌다. 첫 등반은 2006년 그랑드조라스(4208m) 원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씨·채씨와 선배 산악인 김점숙(44)씨는 알프스 3대 북벽 중 하나인 그랑드조라스를 등정하며, 한국 여성 알파인 등반의 서막을 열었다.

 세 명 모두 부부 클라이머다. 이씨는 10년 전 한국을 대표하는 거벽등반가 최석문(39)씨와 결혼했으며, 한씨는 등반가 신성훈(44)씨, 채씨는 국립공원관리공단 소속의 지형우(42)씨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원정대는 17일 귀국한다.

김영주 기자

 
◆알파인 스타일=포터나 셰르파 등의 도움을 받지 않고 고정 캠프나 고정 로프를 사용하지 않는 등반 방식이다. 산소기구를 사용하지 않는 상태에서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등반자 자력으로 정상까지 한 번에 올라가야 하므로 기존 방식보다 훨씬 위험하고 성공 확률도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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