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중화DNA의 부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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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우덕
중국연구소 부소장

미국 뉴욕에 사는 한 지인이 ‘중국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책을 한 권 보내왔다. 『미국이 만든 세계(The World America Made)』라는 제목이다. 저자 로버트 카간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미국이 구축한 세계 질서를 분석하고, 향후 구도 변화를 전망했다.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미국 해군은 자유무역의 확대를 위해 세계 바닷길을 열었다. 그러나 중국은 해군력 증강을 통해 그들의 목적에 맞춰 바다를 닫으려 한다.” 세계 무역의 4분의1이 지나는 남중국해의 해상 루트를 중국에 넘겨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이렇듯 카간이 그려내는 ‘중국의 질서’는 지극히 부정적이다. ‘중국은 아시아에서조차 갈등을 조장할 뿐 리더십을 발휘하기 힘들 것’이라는 분석이다.

 책을 읽는 내내 동아시아의 현실을 돌아보게 됐다. 중국의 경제 부상은 분명 일본·한국·동남아 등 주변 지역 국가에 부(富)를 안겨줬다. 주변국은 세계공장 중국에 부품을 팔았고, 중국의 저임 노동력을 활용해 제품을 만들어 제3국으로 수출했다. 그러나 ‘혜택’은 거기까지였다. 중국의 부상은 정치·군사적으로는 주변국에 큰 압박으로 다가왔고, 위협에 시달리게 했다.

 잦은 해상 마찰이 가장 큰 이유다. 이미 2010년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에서 한 차례 충돌했던 중국과 일본은 요즘에도 이 지역에 전투기를 발진시키는 등 대치하고 있다. 남중국해 갈등 역시 진행 중이다. 중국은 석유자원 개발을 놓고 베트남·필리핀 등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가끔 총소리도 들려온다. 베트남과 필리핀의 편에 선 미국이 함정의 기수를 남중국해로 틀면서 이 지역에는 긴장의 파고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제는 우리나라 이어도 해역에서도 그 여파가 느껴지고 있다.

 동아시아 바다의 영유권 분쟁은 사안마다 고유한 역사·지정학적 문제가 얽혀 있다. 그러나 좀 더 근본을 추적해 보면 그 저변에 중화(中華)주의가 깔려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옛날 왕조시대 우리가 지배했던 땅이기에 우리가 점유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다. 중국을 세계 중심이라 여기고, 변방 나라를 오랑캐로 간주했던 ‘중화DNA’의 부활이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의 보도로 다시 표출된 이어도 관할권 주장에서도 그 심리가 엿보인다.

 중국은 미래 국제 질서 형태로 다극(多極)체제를 꿈꾼다. 아시아의 극(極)은 당연히 중국이라고 본다. ‘황제 시대’에 그랬듯 말이다. 그러기에 아시아의 바다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장악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힘의 외교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주변국과의 갈등을 조장하고, 미국의 개입을 유도할 뿐이다. 중국은 ‘다극체제의 한 주인이 되겠다면, 동아시아 바다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일이 먼저’라는 전문가들의 충고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수퍼파워는커녕 아시아 주인 행세도 하기 힘들 것’이라는 카간의 지적에 힘을 실어줄 뿐이다. 그들이 이어도 해역을 넘본다기에 드는 생각이다.

한우덕 중국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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