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 칼럼

혀가 꼬이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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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 재작년 6월 선거를 치를 때 후보 캠프에서 작성한 회의록, 정세분석 문건, 후보 일정표, 지지 인사·단체 명단 등 꽤 많은 분량의 서류를 얼마 전 입수해 흥미 있게 읽었다. 선거는 역시 민주주의의 꽃이다. 전쟁이나 다름없는 치열한 하루하루가 느껴졌다. 단일화 합의 이전의 박명기 후보에 대해 ‘우리를 공격하는 사실상 적(敵)’이라고 표현한 대목도 있다. 선거캠프와 지원세력에는 우리나라 진보가 거의 망라돼 있다. 최근 문제가 된 서울시교육청의 무리한 승진인사, 공립교사 편법 채용에 관련된 인물도 대부분 포함됐다.

 곽 후보는 곶감 몇 상자를 캠프에 보내면서 “호랑이보다 무서운 게 곶감이라는 것 아시죠. 우리 캠프 지정 군것질입니다”라고 조크를 한다. 한편으로는 대학교수 등 전문가를 초빙해 ‘사교육 문제 현황과 대안’ 등을 주제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강사에 현직 초등학교 교사가 포함돼 있고 고교생들이 캠프를 드나들었으니 공무원·미성년자의 선거운동을 금지한 공직선거법 위반 여부가 의심되긴 한다. 까짓것 지금 와서 무슨 의미가 있으랴. 저마다 당선을 자신하며 조각조각 갈라졌던 당시 보수진영 후보들 캠프는 과연 이만한 열기를 뿜고 있었을까. 턱도 없었을 것으로 본다.

 난처해지면 자꾸 어려운 말을 늘어놓는 사람을 종종 목격한다. 선거에 승리하고 교육청에 입성한 곽 교육감의 혀가 꼬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8월 박명기 후보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면서였다. 박 후보를 매수한 혐의를 받은 곽 교육감은 돈을 건넨 데 대해 “긴급부조” “권원(權原) 없는 사람들의 비진의(非眞意) 의사표시의 편의적 결합”이라고 해명했다. 뻥튀기 행상을 ‘곡물팽창주식회사’라고 부르는 화법이다. 어쨌든 그는 올해 1월 1심 재판에서 벌금 3000만원을 선고받고 교육감직에 복귀했다. 그러나 다른 직책도 아닌 교육감직을 1심에서 유죄를 받은 이가 계속 수행하는 모양새가 반발을 사지 않을 리 없다. 진보진영을 중심으로 더 많은 사람들의 혀가 잇따라 꼬인 이유다.

 진보를 자임하는 한 신문 사설은 직무에 복귀한 곽 교육감에게 “공약 이행에 매진하라”면서 “미리 당선 무효형을 예상해 사퇴를 주장하거나, 쟁점 정책 결정의 유보를 요구하는 것은 법적 안정성을 훼손하는 무책임한 정치공세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이 신문은 2009년 3월 공정택 전 교육감이 3000만원도 아닌 단돈(?) 150만원의 벌금형을 1심에서 선고받자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했는데도 구차하게 자리 보전에 연연한다면 그건 학생과 학부모는 물론 우리 교육계를 두 번 세 번 죽이는 일이 될 것”이라며 “교육계의 어른이자 책임자로서의 처신은 일반 정치인과는 달라야 한다”고 준열하게 꾸짖었다. 혀가 꼬이고 스텝이 엉킨 논법이지만 이 정도는 양반이다. 한 대학교수는 ‘도덕성, 보수에게 던져버려라’는 제목의 신문 기고에서 “어쩌다 도덕성이 진보의 족쇄가 됐는가. 도덕성은 원래 보수의 덕목이다. 도덕성 프레임에 스스로 갇히는 진보를 보며 보수는 웃는다. 진보는 능력으로 승부해라. 정책 만들기도 바빠 죽겠는데 왜 도덕성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노력까지 해야 하나. 도덕성 타령은 진보의 확장에도 방해된다”는 기괴한 논리를 펼쳤다. 백미(白眉)다. 혀가 꼬이다 못해 돌돌 말려들어갔다.

 누구나 혀가 꼬일 수 있다. 술 마시고 집에 늦게 들어가도 아내에게 죄지은 느낌이 들어 말을 더듬는다. 꼿꼿한 혀로 한평생 버텨왔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되도록 혀 꼬일 일 안 하고, 일단 꼬였으면 무리하지 말고 순리대로 풀 궁리를 하는 게 낫다. 무리하면 혀를 삔다. 정권마다 공영방송 사장들이 낙하산으로 내려왔으면 그저 낙하산인 거지 ‘착한 낙하산’과 ‘나쁜 낙하산’을 구별하기 시작하면 혀도 같이 꼬이게 된다. 지난 정부에서 한·미 FTA, 제주 해군기지를 적극 추진했지만 지금은 다른 말을 해야 할 형편이라면 깨끗이 사과하고 새 출발을 하는 게 낫다. 계속 고개 빳빳이 세우면 혀가 더 이상 ‘입안의 혀’처럼 놀아주지 않는다. “그땐 잘 몰랐다”고 해야지 “말 바꾸기가 아니라 말 바로잡기”라고 우기면 구차한 둔사(遁辭)가 된다.

 혀가 꼬이는 이유는 잘못했을 때, 잘 몰랐을 때, 뒤가 구릴 때, 더 큰 이익이 엿보일 때, 본심이 따로 있는 걸 들켰을 때 등등 다양하다. 최선의 해법은 역시 진솔함이다. 우리 사회가 진솔한 사과조차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래, 드디어 자백했구나”라며 더 밟아대는 악습이 있긴 하다. 그래도 일부의 얘기지 착한 일반 시민은 그 정도로 그악스럽지 않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