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이헌재 위기를 쏘다 (52) 서머스 미 재무부 부장관의 방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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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2월, 로런스 서머스 미국 재무부 부장관의 방한은 사실상의 ‘구조조정 점검 여행’이었다. 이 방한 이후 미국과 IMF는 한국 정부에 고금리·긴축재정 기조를 완화해도 좋다는 사인을 보낸다. 2월 24일 서머스 부장관(왼쪽)이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로런스 서머스는 1999년 2월 24일 내 사무실을 찾았다. 미국 재무부 부장관 시절이다. 비비 틀린 폭 좁은 넥타이에 청바지, 스니커즈 차림이었다.

 아시아 순방 일정에 따라 한국을 찾은 그였다. 말이 순방이지 ‘점검 여행’이었다.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과의 구조조정 합의를 잘 이행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겠다는 의도였다.

 찾아온다기에 처음엔 거절했다. 대통령도 아니고 재정경제부 장관도 아니다. 금융감독위원장이 미국 관료의 방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그는 “의례적인 예방이다. 30분만 만나자”고 전해 왔다. 두 번이나 사양할 수 없어 오라 했다.

 그가 들어선 것은 느지막한 오후. 일행이 7명이나 됐다. 지금 미국 재무부 장관인 티머시 가이트너, IMF 부총재인 데이비드 립튼도 일행 중에 있었다. 재무부의 아시아 담당팀이 한꺼번에 들어선 것이다. 나도 서둘러 이종구 제1심의관과 오갑수 부원장보를 불렀다. 서머스는 덕담을 건네며 대화를 시작했다.

 “구조조정을 맡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한국 참 대단합니다. 구조조정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요.”

 자리를 잡자 이들은 돌변했다. 저마다 가방에서 컴퓨터와 커다란 노트를 꺼냈다. 예방이라더니, 질문거리를 깨알같이 적어온 것이다. 내게 동의나 양해도 없이 난데없는 청문회가 시작됐다. 이들은 번갈아 가며 한국의 구조조정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오갑수와 이종구는 거침없이 답했다. ‘이런 질문은 예상도 못했을 텐데 저렇게 맛깔지게 대응하다니…’. 나는 속으로 흐뭇했다. 이종구의 영어가 그리 유창한 줄 처음 알았다. 오갑수는 한술 더 떴다. 본래 한국말보다 영어가 능숙할 정도. 유대계인 서머스의 웅얼거리는 영어를 용케도 알아들었다. 한바탕 질문 공세를 퍼붓더니, 서머스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시겠지만 기업을 살리기 위해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건 안 됩니다. 그리고 5대 그룹 구조조정이 다소 미흡하다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셔야 할 겁니다. 국제 사회가 다 한국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지나친 간섭. 돈을 대는 건 IMF지 미국이 아니다. 하지만 IMF와 국제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미국이다. 미국의 여론이 곧 시장의 여론이다. 나는 그를 성의 있게 대하기로 마음먹은 터다.

 “걱정 마십시오. 구조조정은 어디까지나 워크아웃이라는 투명한 절차에 따라 합니다. 한국 정부가 가장 중시하는 것도 투명성입니다.”

 나는 기업 구조조정의 원칙을 설명했다.

 “5대 그룹 문제는 걱정 마십시오. 올해 말까지 부채 비율을 200% 이내로 떨어뜨리기로 했습니다. 재무구조가 획기적으로 좋아질 겁니다. 계열사끼리 상호지급보증도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

 서머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투명성 확보와 상호보증 해소. 국제 사회가 한국에 우선적으로 요구한 두 가지였다. 다시 말하지만 외환위기는 신뢰의 위기였다. 멀쩡해 보이던 한국 기업이 픽픽 쓰러지자 월스트리트의 한국 담당자들은 일제히 투명성 문제를 지적했다. “한국은 회계가 엉망이다. 우발 채무(contingent liabilities)가 기록이 안 돼 있다” “부채 규모를 파악할 수가 없다. 상호지급보증 때문이다” “밀어내기 수출 관행 때문에 매출 채권을 믿을 수가 없다”는 식이었다. 이런 보고들 때문에 국제 사회에 ‘한국은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인식이 박혔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돈이 빠져나간 것이다.

 서머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번 더 강조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베일아웃(bailout·긴급구제)은 안 됩니다. 한국 정부가 돈을 풀어 기업을 살린다면 세계가 구조조정 의지를 믿지 않을 겁니다.”

 아직도 의심을 못 푸는가. 기분이 나빠 농담처럼 기분 나쁠 말을 던졌다.

 “미국 정부도 GM과 크라이슬러가 어려울 때 지원한 적 있지 않습니까.”

 일행 중 한 명이 바로 받았다.

 “우리는 시장 원칙에 따라 지원한 겁니다. 정부가 지원한 것도 아닙니다.”

 “의회에서 논의한 걸로 아는데요.”

 분위기가 일순 싸늘해졌다. 나는 웃으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워크아웃(기업 개선 작업)은 투명하게 진행될 겁니다. 외국 회계법인의 전문적 지원도 받고 있습니다.”

 30분으로 예정했던 만남은 이미 1시간40분을 넘기고 있었다. 서머스도 환하게 웃으며 일어섰다. “좋습니다. 한국 구조조정에 대해선 더 언급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이걸로 됐습니다. 대통령도 만났으니 이제 더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이날의 만남이 분수령이 됐을까. 이후 IMF는 한국 정부의 저금리, 재정 확장 정책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서머스가 IMF에 어떤 말을 전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IMF가 눈에 띄게 태도를 바꾸는 걸 보며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때 부드럽게 잘 대해주길 잘했다’고 말이다.

등장인물

▶로런스 서머스(58)

경제학자. 삼촌인 고(故) 폴 새뮤얼슨과 외삼촌인 케네스 애로 전 스탠퍼드대 교수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경제학 명문가 출신. 1983년 28세의 나이로 하버드대 경제학과 정교수에 임명돼 최연소 기록을 세웠다. 세계은행을 거쳐 93년 재무부에 들어가 95년 부장관, 99년 장관을 맡았다. 2001년 하버드대 총장이 됐지만 “여성은 선천적으로 수학·과학에 약하다”는 성차별적 발언으로 2006년 퇴임한다. 오바마 정부에서 국가경제회의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유력한 차기 세계은행 총재감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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