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아무리 정치의 계절이라지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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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이정재
경제부장

장군멍군도 이 정도면 예술급이다. 여야 대표선수의 선거전략 말이다(그게 선거전략이 아니라면 더 큰일일 터다).

 장군은 야당 대표 한명숙이 먼저 불렀다. 열흘 전 미국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낸 공개 서한. 야당이 집권하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폐기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서한 말미엔 FTA 독소조항 10개를 붙였다. 꼭 재재협상이 필요한 항목들이란다. 10개로 맞추느라 꽤 고생했겠다 싶긴 하지만 무슨 근거로 골랐는지 좀체 알기 어렵다. 10개 중 이명박 정부 때 새로 협상해 넣은 것은 하나뿐이다. 그것도 관련 업체는 “우리는 괜찮으니 FTA 발효나 서둘러 달라”는 자동차 세이프가드 조항이다. 나머지는 한 대표가 총리를 지낸 노무현 정권에서 합의한 것들이다.

 당시 총리였던 한명숙은 “FTA 반대 불법 폭력에 대해 형사처벌은 물론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말했다. 이랬던 그가 5년 지나 말을 바꿨다며 관련 동영상이 한창 논란인 모양이지만, 그것까지 따질 생각은 없다. 궁금한 건 진정성이다. 그가 정말 의지가 있는 것인지. 그럴 경우 대한민국이 어찌 될지 생각은 해봤는지.

 여당 대표선수 박근혜의 멍군도 간단치 않다. 저축은행 피해자 구제 특별법 얘기다. 2월 7일 여야 합의로 정무위를 통과한 이 법은 세금으로 부산저축은행 예금주들의 손실을 보전해 주자는 게 골자다. 백 번 양보해 법 취지는 이해한다고 치자. 문제는 초법(超法)성과 형평성이다. 소급은 기본이요 원금 보장 한도인 5000만원 넘는 손실도 보전해주잔다. 그뿐이랴. 투기성 짙은 고금리 후순위채 손실도 물어주잔다.

 총선 격전지인 부산 표심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내놓을 수 없는 법이다. 여야가 사실상 만장일치로 이런 법을 만들었다는 것부터 기막힐 노릇인데, 박근혜의 대응도 못지 않다. “법사위에서 논의해야 한다”며 법안 통과에 힘을 실어줬다. 측근들이 “찬성도 반대도 아니라는 의미”라고 둘러댔지만, 집권당 대표선수라면 법사위 논의부터 단호하게 잘라야 했다.

 박근혜·한명숙이 주장하는 일이 진짜 일어나면 어찌될까. FTA를 일방적으로 폐기하면 당장 미국은 ‘나라 같지 않은 나라’라며 등을 돌릴 것이다.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되는 건 당연지사. 한국의 신용등급이 떨어지고, 주가가 급락하며 환율이 요동칠 것이 뻔하다. 한 대표가 이런 일을 예상 못할 리 없다. 노무현 정권에서 장관·총리를 지낸 그다. 노무현 정권이 어떤 정권인가. 반미(反美) 코드로 집권해 미국에 ‘맞짱’ 뜨겠다던 정권이다. 물론 미국이 으름장을 놓고 국제사회가 외면하는 바람에 물러서긴 했다. 집권 초인 2003년 5월, 방미를 앞두고서다. 이라크 파병을 받아들였고, 나중엔 제주 해군기지와 한·미 FTA를 추진했다. 국익을 생각해서다.

 이런 경험이 있는 만큼 이번엔 묘수를 단단히 준비해 놨을 것이다. 어떤 걸지 기대된다. 대한민국이 ‘미국과 전 세계를 상대로 당당히 맞짱 뜨되 나라가 망하지 않을 비책’이 도대체 뭔지.

 박근혜의 저축은행은 또 어떤가. 특별법이 통과되면 모든 사람이 아우성칠 것이다. 저축은행 후순위채는 금융가에선 대표적인 ‘투기용 채권’으로 통한다. 이자도 예금보다 두 배 가까이 더 준다. 떼일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그걸 세금으로 물어줬으니 내 돈도 물어달라고 할 것이다. 주식 투자해서 잃은 돈은 물론이요 경마장에서 잃은 돈, 심지어 도박판에서 잃은 돈까지 세금으로 메워 달라고 할지 모른다. 그뿐이랴. 법과 원칙을 지키느라 금리 낮은 큰 은행에 예금했던 간 작은 소시민들은 일제히 좌절할 것이다. 오죽하면 금융노조가 “선량한 예금자를 모두 바보로 만드는 법”이라고 성명을 냈을까.

 선거 때면 경제를 끌고 가는 정치의 힘이 세진다. 아무리 정치의 계절이니 해도 이건 과하다. 막가파식 여야 대표를 흉내 내 말해보자면 ‘저축은행법도 통과되고, 민주당이 집권해 FTA도 폐기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둘 중 하나는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고도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 정도로 대한민국이 돈 많고 세졌다는 게 확인되든지, 아니면 다시는 이런 지도자들이 정치한다고 나타나지 않게 되든지.